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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수 대하장편소설 '금강'2부 5장 만세 삼창에 술이 석잔 189회 <박태수의 품에 안긴 옥천댁>
한만수  |  news@ccdail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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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0.01.12  15: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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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화=류상영>

숨이 막히도록 온 몸이 녹아드는 전율 속에서 막걸리 냄새가 풍기는 것 같기도 하고 가솔린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등짝을 피가 나도록 움켜잡았던 것 같은 기억이 살아 오르며 손바닥에 촉촉하게 땀이 고여 온다. 신작로에 큰 돌이 있는지 버스가 덜컹 거리며 요동을 쳤다.


순간 안개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보이던 들판이 푸르게 되살아나면서 이마에 땀이 맺혀 있는 것을 느꼈다.
"아녀! 이라믄 안되는 거여. 내가 미쳤구먼……저이는, 저 이는 참말로 영동에 볼 일이 있어서 가능겨. 나 혼자 헛것을 생각하는 거여."


옥천댁은 보따리 안에서 명주손수건을 꺼냈다. 작고 사각으로 접은 손수건을 다시 반으로 접어서 이마의 땀을 찍어 누르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는 순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빗줄기가 마당을 내리꽂는 소리가 들린다. 외양간에 켜 놓은 남포등 아래서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암소의 불룩한 배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암 걱정말고 핀히 주무셔유. 지가 한숨도 안자고 지킬딩께."


등 뒤로 들려오는 묵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뱅이 차림에 적삼만 박태수의 넓은 가슴이 뜨겁게 와 닿는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가슴이 젖가슴을 짓누르면서 막걸리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떫은 감 냄새였던가? 햇밤송이 같은 턱수염이 얼굴을 문지르며 숨을 막히게 하며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서 눈을 번쩍 떴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 같아서창문을 조금 열었다. 창문이 열려진 틈으로 빨려들어 오는 시원한 바람에 부끄러웠던 기억들이 흩어져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여자가, 봄바람 난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남자가 봄바람 났다는 말은 못 들어 봤는데 내가 시방 먼 짓을 하는지 모르겄구먼."


박태수는 운전수가 담배피우는 모습을 보고 담배를 꺼냈다. 괜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버스를 처음 탔을 때와 다르게 후회는 되지 않았다.


후회는 되지 않는데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우스워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이 아니다. 가슴이 저리다 못해 생가슴이 타도록 안타까운 그 무엇을 스스로 포기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우스워서 입이 삐죽거리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버스는 사마니고개를 넘어서 막게 앞에서 잠깐 멈춘다.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쓴 오십 대 를 태우는 사이에 옥천댁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출입문을 바라본다.


박태수는 옥천댁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열 몇 살 어느 봄날 일 것이다. 코밑수염이 거뭇거뭇거릴 즈음이었을 것이다. 학산장에 갔다가 삼거리에서 어떤 소녀를 보고 숨이 막히는 것 같은 전율에 사로잡혔다.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하얀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은 댕기머리 소녀는 우체국에서 나와 막 골목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소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온 몸이 불에 활활 타 버리는 것 같았다.


소녀는 분명히 땅 위를 걷고 있지만 그 어떤 바람에 스르르 밀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녀가 골목 안으로 사라지고 빈 거리만 눈에 들어오기 까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기억은 돌 위에 새겨진처럼 단단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날 밤 처음으로 몽정을 했던 것 같았다. 그 후로 그 소녀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애타는 기대감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몇 번이나 삼거리에 나가 봤지만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시나브로 세월이 흘러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열병 속에서 보낸 세월도 잊어버렸다. 옥천댁의 옆모습에서 까마득하게 잊어버려서 없었던 일 같았던 소녀를 보았을 때의 그 기분이 다시 살아났다.
마치 어제 삼거리에서 그 소녀를 보았던 것처럼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아서 연신 담배 연기를 내 뿜었다.
"한 갑에 이백 환씩이나 한다는 담배가 왜 이지랄로 싱겁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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