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란 존재는 조건 없는 사랑, 무한의 사랑을 주시기에 누구나의 가슴에 그리움과 사랑의 징표로 자리 잡는다. 그런 어머니가 지난 15일 저녁에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와 함께한 55년을 돌아보면 너무도 행복했다. 어머니는 늘 고맙고 고마운 존재였다. 여느 어머니들처럼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는 삶에 익숙했던 어머니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떠나셨다.

돌이켜보면 불효의 연속이었음에도 어머니는 크기를,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랑으로 자식의 허물을 모두 다 감싸 안았다. 그런 어머니와 생전에 왜 좀 더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는지 돌아가신 후에야 통한이 크다. 바쁜 척하고 살아온 지난 시간들이 막상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휑한 빈자리로 돌아왔다. 있을 땐 그 존재의 귀함을 깨닫지 못한다더니 지금의 내 처지가 그러하다.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떠나가신 후, 마트에 진열된 식품이나 백화점의 옷을 보면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흐른다. 생전에 왜 좀 더 맛나고, 좋은 옷 등을 챙겨 드리지 못했는지 가슴 아프다. 어머니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으려 나름대로 신경을 쓰며 살아왔다 싶은데 실상은 내 편한 방식으로 살아 왔다는 게 맞는 말이다.

말년에 걸음걸이가 불편하셔서 자식에게 부탁할 것이 많았을 텐데도 어머니가 특별히 부탁한 기억이 없다. 그저 병원에서 처방받아 약국에서 약을 사다 드리는 게 자식인 내가 한 일의 전부다. 오히려 가끔씩 모아 놓은 돈을 약값에 보태라고 손에 쥐어 주신 분이 어머니였다. 가지고 계셨다가 어머니 필요한데 쓰시라면 내가 뭐 쓸게 있냐며 손사래를 쳤다.

어머니를 보내고서야 왜 그렇게 살았는지, 평소 어머니를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우둔함이 고스란히 통한으로 남는다. 거동이 불편했던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사려 깊게 어머니 입장에서 생각 못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자식에게 서운함을 내비친 적 없다.어머니란 존재는 자신을 위해 삶을 사는 존재가 아닌 것 같다.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희망을 일구고 꽃을 피워 향기를 피우는, 어머니란 존재의 희생의 미학은 숙명적일지는 몰라도 현실적으론 설명이 불가하다.

어머니는 진명여고를 졸업한 신여성으로 한글과 한문을 터득하셨기에 자식들보다도 더 필체가 유려하셨고, 번잡함을 싫어해서 평생 조용히 성실히 사셨다. 공무원들이 어머니의 필체에 놀라 뭐하시는 분이시냐고 묻기도 여러 번이었다는 말을 주위 분들에게 들은 기억이 난다. 어머니를 보며 남, 여 구분이 없이 배움을 통해 사회에 기여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가난했던 아버지를 만나 두 분이 늘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셨다. 부모님은 '진등상회'란 상호로 곡식을 매매하셨는데 '진등상회'의 물건이라 하면 다른 상인들이 속을 확인해보지 않고도 믿었다고 할 정도로 신뢰를 얻었고, 자식들에게도 스스로 땀 흘려 번 돈이 아니면 욕심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기억이 삶을 다잡는 데 큰 힘이 됐다.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손수 놓으신 자수와 집안 내력을 적어 놓은 노트가 몇 점 있고, 패물이라곤 거의 없고 쌍가락지 금반지와 은수저만 눈에 띈다. 참으로 조촐하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어머님이 가시기 전 16일 동안 노인병원에 계셨는데 이때,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죽음에 대한 준비와 마음 자세를 어찌 지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신 것도 큰 고마움이다.

배금주의로 치닫는 요즘의 세태지만 어머니의 임종을 보며 물질이 다가 아님을 깨달았다. 모든 것에 대한 지나친 욕심이 부질없고, 무엇보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머니의 팔과 다리를 주물러드리는 행복도, 어머니 곁에 눕는 행복도 누릴 수 없다. 어머니의 따뜻한 말씀과 꾸지람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그토록 가진 모두를 아낌없이 나눠 주신 어머니지만 해드린 게 너무도 없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지 못한 회한이 하나 둘이 아니다. 불효자의 잘못을 어찌 말로 다할까만 부디 극락세상에서 평안하세요.

▲ 김태철
청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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