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성현들은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 도덕이 온전하고 재주가 갖추어진 사람을 일컬어 군자라 했다. 그러나 이 말은 남자에게는 해당되나 부인에게는 상관이 없는 말이다....(중략)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여자라도 덕이 이미 온전히 갖추어졌고, 재주도 통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면 어찌 여자라하여 군자라 일컫지 못하겠는가. 그러하니 그녀를 여자 중의 군자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정호 1648~1736)
"필력이 살아 움직이고 모양을 그린 것이 실물과 똑 같아, 줄기와 잎사귀는 마치 이슬을 머금은 것 같고, 풀벌레는 살아 움직이는 것 같으며, 오이와 수박은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몰래 입에 침이 흐르니, 어찌 천하에 보배라 하지 않으리오."(권상하 1641~1721)
"타고난 자질이 맑고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몸가짐이 단정하고 순결하며 말이 적고 행실이 바른 분이셨다. 또 경전과 사기에 통하고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바느질과 자수에도 신비에 가까울 정도였다"(신석우 1805~1865)
위는 신사임당(1504~1551)을 두고 후세의 사람들이 하는 말들이다. 신사임당은 조선중기의 여류문인이며 화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리고 현재는 화폐의 도안 인물로 선정되어 한동안 여성계에서 논란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다. 논란의 이유인즉, 신사임당은 유교사회가 원한 규범적 여인으로 여필종부, 현모양처가 현시대에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과 맞선 또 다른 시각에서는 현모양처로만 규정짓는 것은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보는 것일 뿐, 그녀는 종속적이고 자유롭지 못한 유교사회에서 개인으로서 자아를 실현한 여성으로 오늘날 현대 여성들의 귀감이 되기에 손색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결과는 우리사회의 양성평등의식 제고와 여성의 사회참여에 긍정적으로 기여, 자녀들의 재능을 살려 나라의 인재로 키워낸 점 등을 높이 평가하여 신사임당을 화폐의 인물로 선정하였다.
그렇다. 조선중기는 성리학이 본격적인 담론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통치하는 국가이념으로 자리매김해 모든 것이 남성중심을 두고 돌아가던 시대였다. 남존여비, 가부장제, 삼강오륜 등은 이 시대의 여성차별성을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임당은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 독립된 인격체로서 당대 최고의 여류예술가로 혼을 불태웠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인재를 배출한 어머니로 시대를 앞서 살았던 여인이었다.
그 한 예로, 신사임당은 친정아버지의 3년 상을 마치고서야 시어머니 홍씨를 상면했고, 친정어머니를 홀로 둘 수 없어 친정과 시집을 오가다 정작 시집으로 들어간 것이 결혼 후 20년이 지난 7남매 중 6남매를 낳고나서였으니 그녀의 삶을 굳이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보지 않아도 그녀가 얼마만큼 부계중심의 차별성을 의연하게 외면했던 것인지는 알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당시의 주종관계를 이루었던 부부관계에서도 남편 이원수를 설득해 과거에 나갈 수 있게 리드했고, 남편이 첩들이기를 원했을 때는 자신의 해박한 지식과 논리로 거절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으니 이는 유교사회가 원했던 규범적여인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모양처로, 여류문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물론 그것은 그녀의 탁월한 예술성과 자아실현의 노력이며 아들 율곡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남편과 시어머니의 이해와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그녀의 예술성을 인정해주고 자랑했다고 하지 않던가.
이제 얼마 후면 귀성전쟁이 시작되는 명절이다. 그래서 주부들은 벌써부터 우울하다.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주부들은 명절이 다가오면 소화도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이다. 또 명절 끝에는 이혼하는 부부들도 상당하다고 한다. 왜 일까. 물론 모를 이 없다. 바라건대, 올 명절부터는 어느 한쪽 중심의 명절이 아닌 모두가 함께 즐기고 화합하는 명절이었으면 한다.
![]() |
| ▲ 신현자 소설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