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부, 반초고성과 장건

▲ 1. 반초고성 입구 2. 반초고성 반초공원 3. 반초의 동상 4. 반초의 부하들 5. 반초공원의 대리석조각 6. 반초공원의 대리석조각 7. 한족과 타민족의 화합을 강조하는 조각상 8. 반초고성의 흔적
생각지 않은 항공편의 연기로 우루무치의 천산산맥 초원을 대신해 찾아가는 카슈가르의 반초고성에 도착하니 설명을 잘못 들었나 보다. 사진에 나오는 초원의 언덕에 있는 고풍스런 멋진 성채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을 해 그나마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달려가니 고성이 아닌 공원의 모습이다. 최근에 중국이 한족의 서역개척을 기념하기 위해 대리석을 깎아 서역개척의 형상을 만들어 놓은 조각공원이다. 한족의 활동무대를 서쪽으로 넓혀나간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작은 공원으로 보이는 반초고성에는 반초의 대리석 동상이 우뚝 서있고 하얀 대리석에 그려놓은 그림의 내용은 실크로드를 개척한 반초와 장건이 서역을 정벌하는 모습과 이곳의 원주민들과 화합하는 내용을 주제로 보여 준다. 실제 한족의 서역(실크로드)경영의 시작은 장건과 반초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반초와 장건은 실크로드 즉 서역의 개척자로 19세기에 보여준 유럽의 여러 탐험가보다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있다 할 수 있다. 한 가지 의문점은 장건이 반초보다 약 2세기 이상 먼저 서역을 개척하는 중요한 일을 했으나 이곳에서 볼 때 반초의 업적을 더 높이 사고 있는 것 같아 이유를 모르겠다.
반초([班超·33~102)는 후한 초기의 무장으로 73년 후한 2대 황제인 효명황제 때 흉노(匈奴)토벌에 참가해 별장(別將)으로 공을 세웠다 한다. 91년 쿠처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하고 도호부가 돼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을 넘어 흉노나 훈족을 토벌하며 유럽 카스피해 지역까지 실크로드지역을 확장하는 대업을 남기게 된다. 반초는 서역(西域)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오아시스의 여러 고대국가들을 정복했고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50여개의 나라를 한(漢)나라에 복속시키는 업적을 남겼으며 반초의 형인 반고(班固 32~92)는 한서(漢書)의 저자이기도 하다.
반초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반초는 산시성(陝西省) 셴양(咸陽)에서 출생해 학자인 아버지 반표(班彪)의 뜻을 이어받아 학문에 마음을 두고 뤄양(洛陽·낙양)으로 갔으나 사서(寫書)를 하면서 어머니를 모시는 부담이 크자 무인(武人)으로서 입신양명할 것을 결심한다. 73년 두고(竇固)를 따라 흉노(匈奴)토벌의 별장(別將)으로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그 후 31년 동안 서역(西域)에 머물며 선선(躇善 선선)·우전(于蚊 호탄)·구자(龜玆 쿠처)·언기(焉耆 쿠얼러) 등 오아시스 국가들을 정복하고 부하 감영(甘英)을 페르시아(灣)와 로마에 파견해 서아시아와 유럽의 정보를 수집하는 많은 공적을 세운 사람이라고 한다.
반초공원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은 반초가 무장으로 36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서역으로 들어 왔다고 하는데 공원의 조각상에는 병사들이 아닌 문인과 무인의 주요 관직들의 동상모습으로 나란히 서있어 당시 이름도 없었을 것 같은 병사들에게 이름까지 붙여가며 그 모습을 과장해 조각품으로 세운 것인지 이해가 잘 안 되고 있다. 반초공원 앞에 있는 포도덩굴에 청포도가 익어가는 모습이 더 눈에 들어오고 있다.
반초보다 2세기를 앞서 전한시대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의 업적을 앞세우지 않고 반초를 조명하는 이유는 장건보다 반초의 업적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일까.
실크로드 즉 서역개척의 선구자 장건(張騫·?~bc 114·지금의 산시 성 성고현(城固縣) 사람)은 한나라 때의 여행가로 소개를 하고 있으나 한나라의 관리로 근무하던 중 한무제 유철의 명으로 서역으로 사신이 돼 갔다가 오랫동안 서역을 누비게 돼 여행가로 알려지게 된 것 같다. 장건은 중국역사에 있어 한족이 서역에 대한 정보가 없던 시절 최초로 서역교통로를 개척한 사람으로 오손에서 그가 파견한 부사들이 서역 국가들의 사절과 대상들을 데리고 돌아오며 한나라와 서역의 나라들이 서로 통상을 시작하게 되는 큰 공을 세우기도 한다. 때문에 장건의 서역답사로 서역의 지리, 민족, 산물 등에 관한 지식들이 중국으로 유입이 되면서 유라시아 동서간의 교역과 문화가 교류되며 발전하게 됐다.
장건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다. 한무제(漢武帝)의 명을 받고 흉노를 협공하기 위해 일리강(이리江·카자흐스탄지역 하천으로 천산산맥에서 북쪽으로 흘러 발하슈호로 흘러든다) 유역에 있던 대월지(大月氏·중국 전국(戰國)시대에서 한(漢)나라 때까지 중앙아시아 아무다르야강(江)유역에서 활약한 이란계(系) 또는 투르크계의 민족)와 동맹을 하고자 bc 139년경 100여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했다. 장안을 떠난지 얼마 안 돼 지금의 감숙성에서 흉노에게 붙잡혀 흉노 군신선우의 억류 속에 10년간 흉노에 체류한다. 장건은 흉노여인과 결혼해 자식을 두기도 했지만 탈출을 해 대완(大宛)·강거(康居)를 거쳐 이미 아무다리야 북안으로 옮긴 대월지에 도착한다(bc 129년경). 그러나 흉노에게 밀려난 대월지는 새로운 땅에서 풍요로운 생활을 하며 흉노에게 복수할 마음이 없어 동맹에 실패하고 강철을 만드는 귀중한 자료를 얻어 귀국하던 중 다시 흉노의 포로가 됐다가 bc 126년 귀국했다. 이때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을 구해 한나라로 들여왔다고 한다. 이후 위청과 함께 흉노를 토벌하는데 많은 공을 세운다. 무려 1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한나라를 떠나 처음 밟아보는 미지의 적국 땅에서 억류되기도 하며 표류하기도 하며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이야말로 실크로드의 개척자가 아닐까 싶다.
장건이 실크로드를 답사여행을 할 때 사천성의 대나무와 옷감 등이 유통되는 것을 보고 사천성∼원난성∼미얀마∼인도로 통하는 통상로가 있음을 알고 한무제에게 원난성을 한나라에 복속시킬 것을 건의 한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차마고도의 일부지역을 개척하게 된 것이다. 실크로드와 차마고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상로가 되고 있으니 장건에 의해 중요한 두 개의 통상로가 열리게 되니 서역의 실질적인 개척자라 하고 싶다.
반초공원 대리석에 조각된 내용은 장건과 반초가 서역을 개척하고 한족과 토착민들이 함께 어울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2000년 전 장건이나 반초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19세기보다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실크로드를 개척하였기 때문에 19세기를 전후로 활동한 탐험가들의 활동을 훨씬 능가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썰렁해 보이는 반초공원 뒤로 토성흔적이라도 있나 해 돌아 가보니 민가의 흙벽돌 담장인지 반초고성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이 있고 담장 아래에는 위구르족 한 가족들이 모여 양고기를 삶고 빵을 기름에 튀기고 있는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며 후각을 자극한다.
한 가지 중국 한족의 서역경영에 있어 고선지 장군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틀림없는데 어디에도 흉상하나 만들어 놓고 있지 않고 있다. 고구려라는 유민출신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험난한 파미르고원을 넘고 주변의 72개국을 당나라에 복속시켰다는 커다란 업적이 무색하다. 언젠가 고선지 장군에 대한 재조명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며 쿠처나 카슈가르에 고선지 장군의 동상이 하나쯤 있어 한다는 생각을 하여본다.
공원으로 보이는 반초고성을 돌아보며 중국 한족에 의해 개척되고 지배를 받고 있는 실크로드의 중심에는 위구르족이 있다. 중국 신강성 지역 현재의 위구르족은 8세기 중반 몽고고원을 지배하며 당나라에 압박을 가할 정도로 세력을 키우기도 하나 9세기 중엽 북방의 키르기스 족에 의해 지금의 신강 지방으로 밀려나며 타림분지 주변에 정착을 하게 된다. 이후 명과 청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실크로드의 중심에 있던 위구르족이 지금은 중국 속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많은 갈등 속에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가고 있지만 앞날이 희망적인지는 알 수가 없다. 위구르족의 실크로드로 남아 그들만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간직하기를 기대하여 보고 싶은 마음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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