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행정 … 계급간 갈등 해소

부여 지방의 동학교도들이 동학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에 나선 것은 이른바 9월 18일 재기포 시기였다. 그렇지만 동학 혁명 초기에 동학 교도들이 도소를 차려 계급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민주적인 행정을 벌인 것은 부여 지역만의 특징이다.

부여에는 도소를 차려 계급 간의 갈등을 민주적으로 운영했다. 1895년 2월, 부여군 규암면 나복리 건지말에서 이칠년(李七年) 등 몇 명이 토벌군에게 붙잡혀 효수되었다 는 정토(征討) 기록이 보인다.


● 부여지방의 동학혁명 초기 활동 기록 '일기'

부여 군청 문화관광과 역시 동학혁명사에 대해 별로 아는 게없었다.

그저 전봉준이 군사를 이끌고 지나갔던 지역 정도였다.

그러나 군지(郡誌)를 들추다 아주 구체적인 자료를 만났다.

소정 이복영(小亭李復榮)의 <일기>가 그것인데, 부여 지방 동학혁명 초기 활동이 소상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일기>는 이복영의 나이 스무 살 때(1889)부터 65세(1934)까지매일 써온 평범한 일기지만 동학혁명 시기의 정황이 아주 구체적이어서 당시 교도활동을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 동학교도의 포접 활동은 민주 행정의 표본

일기에는 동학혁명 당시 부여 읍 중정리 가탑리 능산리 염창리 일대에 동학 활동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기>에 따르면 부여 대방면 지역에 동학혁명군이 포접(包接)조직을 설립한 것은 6월말에서 7월 초순 경이었다.

6월 27일경 전북 함열을 거쳐 금강을 건너 북상하던 동학혁명군은부여 임천 홍산 석성 등지에서 그 지역 동학 세력과 일반 농민들의호응 가운데 포접 조직을 확대해 나간다.

부여 지방의 포접 조직의 총본부는 7월 12일 대방면 중리에 위치한 민 참의 가 뒤뜰에 설치되었다.

당시 동학교도들은 산상에 차일을 치고 주문을 통송 하거나, 마치 군대처럼 방포하면서 진을 익히는 등 위세를 과시하였다 고 한다.

요컨대, 대방면 동학혁명군은 군아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보수 유학 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한 상태였다.

말하자면 부여 지역의 포 조직은 정치 조직인 동시에 군사 조직이었고, 여기에 장용한 최천순(崔天順) 송천순(宋川順)와 같은 접주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당시 접주들은 중리 사람으로, 동학 교도들은 대방면 사정에밝았을 뿐만 아니라 고리대 문제는 물론 국전(國典)의 여러 조항들을 운운할 정도로 세상 물리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고 적었다.

대방면 포에서는 각종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전체 집회 격인 도회(都會)를 열어 포 운영의 기본방침을 결정했다.

예를 들면 동학 접주와 민 씨 가를 비호한 문제가 발생하자 동학교도들은 도회를 열어 대방면 접주의 전횡을 비판하기도 하고, 대방포의 위치를 인근의 가속 시장거리(佳束가탑리 내의 작은 자연촌락 명칭)로 옮길 것을 결의하기도 한다.

이로 보아 대방면 포접의 권력 구성은 접주와 접사로 이어지는 실무 집행 기구와 동학교도들의 전체 집회인 도회라는 의결기구로 이원화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가속 시장거리에서 개최된 도회의 주요 구성원을 보면 도회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동리의 상민(常民) 성만(性滿) (천민 이름으로 보임) 업성(業成) (머슴 이름으로 보임), 교정(較丁, 가마꾼) 노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 보아 도회는 이른바 원민 계층인 천민을 중심으로 구성 되어집행되었던 것이다.

동학교도 지배에 들어간 시기의 부여 사회는 양반을 정점으로편제되던 기존의 향촌 질서와는 성격이 크게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아무리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토호 양반이라도 횡포한 양반으로 지목되면 다른 지역으로 도피하거나 일정한 부역을 통해 삶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노예와 주인 사이라 하더라도 서로 말을 높이고, 같은 마루에서 동석대좌(同席對坐)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본질적인 동학 이념의 실천인 셈인데, 당시 대방면 동학교도들이 추구했던 일은 반족(班族)을 능욕(凌辱班族)하거나 재산 빼앗기 노예들을 양인으로 바꾸기 산송(山訟= 묘지 분쟁)문제를해결하기 고리대관행, 고용관행, 소작관행 개선 등 봉건 지배층의 신분적 특권을 이용한 횡포를 타파 하는 혁명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동학교도들은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국전(國典), 즉 나라의 법질서를 어느 정도 참조하기는 했으나 굴총(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행위), 고리대 변제 거부, 지세 및 소작료 불납 등 국법을 근본적으로무시하는 활동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렇게 되자 동학교도의 위세에 눌린 양반들은 목숨을 유지하기위해 그들이 정해놓은 법을 잘 따랐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스스로 재물을 바쳐 목숨을 부지하기도 했다.

비록 넉 달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이긴 하지만 이런 동학교도의 혁명적인 포접 활동은 이 지역만의 특징이다.

● 동학교도의 잔혹한 토벌 기록

이 시기에 일본의 조선침략 정책이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1894년 5월 일본군이 청도 앞바다에서 청나라 군사를실은 배를 격침시키고, 6월에는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을 점거한다.

8월에 이르자 일본은 평양전투에서 승리하고, 친일내각을 수립하는 등 조선침략이 한층 구체적으로 진행된다.

일본이 동학교도를 소탕하기 위해 군사 행동을 개시하자 2세 교주 최시형은 9월 18일 재기포령을 내리게 되고, 부여 지역 동학교도들도 군사 행동으로 나선다.

전봉준이 이끄는 호남의 동학군이 삼례를 떠나 서서히 북상하면서 부여 임천 홍산 지역의 동학교도들도 서서히 동학혁명의 태풍 권에 휘말려 든다.

비록 기록이 제한적이라 부여지방의 후기 동학혁명 사실이 미궁에 빠져 있지만, 이런 동학교도 중심의 부여 사회는 1894년 11월 초 공주전투에서 동학혁명군의 대패와 동시에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동학혁명 이듬해인 1895년 2월 13일(양력) 정산 건지동(乾芝洞현 부여군 규암면 나복리 건지말)에서 이칠년(李七年) 외몇 명이 토벌군에게 붙잡혀 효수되었다 는 정토(征討)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



채길순 소설가 ·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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