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 최초 '혁명의 불길' 번지다

갑오년 봄, 전라도 지방에서 발발한 동학혁명의 불길은 이와 거의 동시에 회덕 진잠 고을에서도 일어났다. 당시 지도자는 서장옥(徐章玉일명 徐仁周, 호 一海, 1852∼1900)이었고, 이와 함께 동학혁명의 불길은 청산 문의 충주 신당장터 등지로 번져갔다.동학혁명 후기에는 지역의 동학혁명군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전라도 김개남 장군이 이끄는 1만여 대부대가 회덕 진잠 두 고을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 지역 동학혁명사 연구는 비교적 일찍부터 시작되었지만 깊은 연구는 진행되지 않았다.

● 동학교도 금산 등 진출…싸움 주도

충청도 동학혁명사에서 일찍부터 거론된 인물이서장옥이다.

서장옥은 동학혁명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로, 1895년 3월29일 교수형을 당한 전봉준 김덕명최경선 등 호남지방 동학 두령의 정신적 지도자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서장옥은 특히 포교 초기부터 최시형의 측근 참모역할을 했다.

기축(1889)년에 서장옥이 관아에 체포되자 최시형은 전 교단의 힘을 기울여 석방운동을 벌였을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며, 청주 율봉 음선장의 사위가 되면서 최시형과는 사돈 간이 된다.

서장옥은 석방이 된 뒤에도 충청도와 전라도 광범위한 지역에 대한 포교는 물론 동학혁명 시기 내내 강경파로 활약한 인물이다.

회덕 진잠 두 고을은 서장옥 접주의 영향 아래 놓이면서 전라도 고창 기포 시기에 맞춰 들고 일어나 회덕관아를 점령한다.

문석봉(文錫鳳)이 기록한 <의산유고(義山遺稿)>에 주도자 이름이 거론되었을 뿐 상세한 기록은전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교단 기록이 있다.

3월 하순 동학 교도들이 전라도 일대를 휩쓸자최시형의 문하에 있던 참모들은 최시형을 움직이기에 성공, 4월 2일 각 접주에게 통문이 띄워지고, 4월7일을 기해 청산 소사리(小巳洞작은뱀골)에 동학교도들이 모였다.

이들은 청산을 떠나 공주목과 진잠 현의 경계인 성전리(星田里현 유성)을 점거하였고 회덕을 습격하고 이어 진잠으로 몰려들었다.

즉, 두 고을에서 전라도와 때를 맞춰 봉기했다는 뜻이다.

이들은 공주 목을 향해 가려고 성전 뜰에다 진을 쳤던 것이다.

문석봉의 문헌에 따르면 김재덕(金在德) 김성봉(金成奉) 이홍이(李洪伊) 등이 금산 영동 황간 관아를 점령하는데 앞장섰다 는 주동자 이름과, 4월 이래 회덕 진잠 청산 보은 옥천 문의에 난민(亂民)이출몰했다 라는 사실로 이 지역의 동학활동을 짐작할수 있다.

회덕에서 무장한 동학교도들은 진잠 금산 진산으로 진출하여 싸움을 주도했다.

그러나 옥천 황간 영동 지방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던 조재벽과의 연관성을 포함하여 아직 해명돼야 할역사적 과제가 많다.

어떻든, 서장옥은 그 해 9월 쌍다리 장터 싸움을 주도한 뒤 약 5년 동안 행적이 끊겼다가 1900년에 경군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진다.

● 회덕 근교 지명장터 싸움

위의 두 지역은 전라도 지방과 마찬가지로 청일전쟁 발발과 함께 활동이 잠잠해졌다가 9월18일 재 기포와 함께 활동이 재개 된다.

특히 회덕 근교의 지명장터(현 대전시 신탄진구삼정동) 싸움이 구전이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현재 지명장터는 대청댐에 잠겼으나 삼정동에 후손 강봉식 씨가 동학 혁명 당시의 활동상을 들려준다.

후손 강봉식 씨가 증조부 대에 강풍주(姜豊柱),그의 아들 강우경(姜禹卿), 6촌 아우 강덕주(姜德柱) 등 세 사람이 붙잡혀 문의 남장에서 총살당했다고 증언 하는데 이는 당시 관군 토벌 일지 기록과 일치한다.

여러 기록에 회덕 접주 박성엽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고 있지만 그의 활동상은 확인되지 않았다.



● 호남 동학군이 다시 점령

진잠 관아는 김개남 장군이 이끄는 동학 혁명군으로부터 두 차례 공격을 받은 사실이 확인 되었는데, 진잠 현감의 첫 번째 장계에 남원에서 웅거하던 김개남 장군이 이끄는 1만 동학 혁명군이 청주성을 향해 진격 하면서 진잠 관아를 공격했고, 두번째 장계에서 김개남 군이 패해서 연산 쪽으로 도망했다 는 내용은 김개남이 청주성에서 완전히 전투력을 상실했다는 정황을 사실적으로 뒷받침한다.

위의 사실을 종합하면, 진잠은 김개남군이 청주성을 공격할 때와 패퇴할 때 두 번을 거쳐 간 셈인데, 이는 금산을 우회하여 공주 성으로 들어가려다진잠에 이르렀을 때 전봉준 손병희가 인솔하는 동학대연합군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했다는 전보를접하고 청주 성으로 공격 목표를 바꿨을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초토사들에 의해 많은 동학교도들이 희생터인 포사배미 가 확인되었고, 관군이 을미년까지동학교도들을 토벌한 사실이 기록과 증언을 통해 확인 되었다.

진잠 동헌(현 진잠초등학교 자리) 앞에 세워졌던동학 혁명 당시 수령이었던 정 군수의 송덕비가 밭에 묻혔다가 논으로 바뀌면서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 연기, 고을의 동학 8한

전의 고을은 동학 8한이 있었다 고 할 만큼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성했다.

연기 봉암동에는 이두황이 들어와 진을 쳤고, 이곳에서 높은정이(高亭里현 충남 연기군 남면 고정리)출신 이진한(李鎭漢) 접주를 붙잡아 포살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전의 읍내에서 동학혁명 당시 많은 동학혁명군이잡혀 포살되었다는 증언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당시 기록과 일치 한다.

그러나 기록으로 알려진 동학 접주는 최명규 뿐이다.

전의 동학 혁명군은 주로 공주 전투와 목천 천안 등근동의 세성산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설명=대전광역시 대덕구(大德區) 송촌동(宋村洞)에 있는 조선 중기 건축물.>





채길순 소설가 ·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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