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꼬마가 한글을 막 배워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동물들의 운동회 이야기를 다룬 동화를 소리 내어 읽어가다가 "기린이 자빠졌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읽었다. 어이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 어떻게 그게 '자빠졌습니다'니? 다시 한 번 읽어봐."

짧고 강한 내 어투에 아이는 긴장을 하였는지 한동안 침묵을 흘렸다. 보아하니 마지막 장면에서 기린이 넘어지는 바람에 토끼가 1등을 하였다는 내용인 듯하였다. 녀석은 슬그머니 책 아랫부분에 기린이 넘어진 그림을 보더니 이제야 알았다는 듯 자신 있는 목소리로 외치다시피 이렇게 읽었다."기린이 꼬꾸라졌습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먼저 새어나와 번져 버린다.

나도 간혹은 녀석처럼 제대로 관찰하지 않고 순전히 내 추측에 의해서 답을 내어 곤경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백화점에서 80% 빅세일을 한다고 하여 덥석 잡은 물품들은 언제나 '일부품목제외'이거나 '5%세일대상 품목'에 속하였었고, 무슨 무슨 제품을 사용하여 이렇게 좋아졌다고 하면 나는 항상 개인의 사정에 따라 별 효과를 보지 못 하는 그 주인공이곤 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 봄에도 나는 착각 속에 빠져 1년 내내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다. 중,고생 대상 주간학습지 회사들은 해마다 3월이면 고3교실마다 그네들 회사의 학습지를 열심히 하여 좋은 성적을 내거나 좋은 대학을 간 친구들의 수기집을 가차없이 뿌리곤하였다. 그 때도 열 명 안팎의 수기를 쓴 주인공이 내년에는 내가 될 지도 모른다는 착각과 함께 학습지회사 영업사원대신 부모님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1년 내내 학습지는 우리 집에 도착하는 그 순간부터 폐휴지가 되었었던 기억이 쓴 웃음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의미있는 숫자로 취급하지도 않는 0.1%, 아니 어쩜 0.01%도 안 되는 가능성에 대한 무모한 기대감으로 얼룩진 슬픈 기억이 아닌가 싶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는 좀 모자란 듯 하기도하고, 주도면밀하지도 못하여 많은 시행착오를 겪기도 한다. 가끔은 그게 사람냄새 나게 하는 거 아니겠냐고 스스로 위로하지만 어떤 날은 주의깊지 못함에 대한 시행착오의 대가가 참으로 아프고 클 때도 있다.

어느 광고에서 주는 문구처럼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들 듯 작은 숫자하나 , 문장에서의 조사 하나가 많은 것을 차이나게 하고 있으니 이번 봄맞이 대청소를 할 때에는 겨우내 묵었던 먼지와 함께 덜렁거리는 내 부주의함을 털어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봄바람처럼 온화한 기온이 잠시 스쳤을 때, 봄인가 싶어 미리 머리를 세상 밖으로 들이 밀었던 연한 싹 몇 개가 피지도 못하고 꽃샘추위에 생을 끝내버린 가지가 아침 출근길 내 눈에 띄었다. 꼭 날 닮은 것 같은 안쓰러운 마음에 손바닥을 싹싹비벼서 온기를 전달해주고는 유난히 차가워진 황사바람에 옷깃을 세웠다. 몇 발작 걸어가는 동안 왜 그리도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하던지...

'3월은 봄이 아니야, 단지 봄 옷을 한 번 쯤 입어볼 수 있는 달인게지' 혼자서 주문처럼 되 뇌였던 3월의 어느 아침이었다.

▲ 김미혜 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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