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 진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학창시절 모두가 한번쯤은 암기했을 송강 정철의 시다. 45세의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 중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지은 시조를 우리는 일찍이 교과서에 수록하여 경로사상을 고취시켜 왔다. 물론 경로사상을 고취하는 것에 있어 정철의 시가 으뜸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만큼 우리는 예부터 노인에 대한 공경과 예우를 바탕에 두고 문화를 형성해 왔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같이 문화에 근간을 이루었던 효의 가치관이 예전만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비오는 날의 퇴근시간이었다.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노인이 전철 안에서 험한 표정으로 한 여학생을 꾸짖고 있었다. 버릇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묘했다. 이유인 즉, 노인들이 전철을 탔을 때 이미 경로석은 다 차있었다. 그래서 노인들은 일반석에 앉아있는 젊은이 둘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앉아있는 사람들이 미처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한 노인이 검지를 까닥여 둘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노인은 셋이었다. 자리에 앉지 못한 노인이 주위를 둘러보다 마침 맞은편의 여학생을 발견하고는 여학생에게 다가가 앉아있는 여학생의 종아리를 우산 끝으로 슬쩍 건드렸다. 헌데, 여학생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인은 재차 똑같은 행동을 했다. 이때 여학생이 우산을 탁 차내며 노인의 얼굴을 빤히 노려보았던 것이다

최근 통계청이 발간한 '2009 한국의 사회지표'에서는 전체 인구 가운데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10.7%로 역대 최고치를 나타냈다고 보고했다. 젊은 세대들이 부담해야 할 노인의 증가율을 보고한 것이다. 이와 함께 국토해양부에서는 전철적자의 주요인을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지급되는 무임승차 탓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온천욕과 관광으로 인한 노인들의 무임승차가 부쩍 증가했다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여기에 노인들은 분개했다. 한국전쟁이후 굳건하게 살아남아 국민소득을 2만 불 이상으로 끌어올린 세대들에게 제대로 된 노인복지정책은커녕 그깟 무임승차로 그럴 수 있느냐고 한탄했다. 맞는 말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가족들 생계를 위해 불철주야로 뛰어온 세대들, 배우지 못한 한을 대물림시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노후준비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세대들. 그러니 서운한 기색을 토로할 만하다. 하지만 '짐 벗어 나를 주오'했던 과거의 공경과 예우를 찾을 수 없다고 사회를 지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굳이 출근시간에 맞춰 나들이를 해야 하고 그깟 자리다툼으로 얼굴을 붉혀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는 얘기다. 물론 무임승차에도 나들이 계획 한번 세워보지 못한 노인들도 많다. 하지만 출근시간에 천안행 전철이 노인들로 붐비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산업사회로의 전환, 가족구조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등으로 오늘날 세대 간의 간격은 커졌다. 또한 노인문제와 맞물려 있는 청년실업에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저출산 등으로 사회가 짊어진 짐은 만만치 않다. 분노와 훈계에 앞서 삶의 연륜과 지혜로 젊은 세대들에게 성숙함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보이는 것에만 민감한 세대들 스스로가 공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올 테니.

그날 노인은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곱지 않은 시선들이 누구를 향해 있었는가를.

▲ 신현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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