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풍

'뭣하러 왔어 나 죽는 꼴 보러 온거여' /할아버지 버럭 화내시고 사랑방으로 나가셨다. /'밑빠진 독에 물붇기 아니니?'/ 다시 안 온다며 차례가 끝나기 전, 삼촌이 떠나셨다./ '난 배 터져 죽는 줄 아나 봐'/ 엄마는 맏 며느리 된걸 후회하나 보다./ 나도 큰 아들인데........

필자의 시 '억울해'전문이다. 추석은 추썩추썩 다가온다더니 옛말 틀린게 하나없다. 유난했던 찜통 더위와 가끔 기습적으로 올라온 국적불명의 태풍도 언제 그랬느냐 싶게 말쑥한 한가위 들판되어 객지의 피붙이가 고향 포옹을 준비한다. 벌초에 나선 자손들 정성도 남다르다. 햇밤송이 마중으로 가을 세상도 구수하다.

-가풍

여러 해 전부터 부모님을 산소에서나 뵈어야 하는 아릿함은 이번 명절이라고 다를 게 없다. 내겐아버지와 어머니 제삿 날짜가 채 한 달 사이도 안된다. 고등학교 3학년, 입시준비로 한창 정독반을 달굴 때 이승을 등뒤로 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언제나 풍부하셨던 유머부터 떠올리게 된다. 60년대 후반은 대부분 궁핍하여 끼니라고 해야'아침밥 저녁죽' 이었으며 점심같은 건 아예 엄두도 못냈었다. 슬하에 8남매를 두신 부모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사를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추석명절은 차례와 성묘를 하며 막혔던 이야기와 가풍을 익히게 하셨다.다섯 째 아들인 내가 읍내중학교 입학시험 결과를 알리는 방이 붙던 날은 합격번호를나보다 먼저 찾아내시고 당신의 따스한 등에 업은 채 세상을 다 얻으신 양 좋아하셨다. 3년이 지난 뒤 다시 고등학교에 합격했을 때는 반대로 아버지를 처음 업어 보았다. 아버진 생각보다 너무 가벼우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부터나쁜병이란 놈이 자라기 시작했을 거라는 때늦은 안타까움에 싸인다. 그 후 혼자되신 어머니는 말 못할 외로운 기색도 못한 채 나머지 자식들 일을 감당 하셨다.'내 젤로 기쁜 날이 언젠 줄 알아. 우리 팔남매 한자리 서 웃는 모습이여.' 생전 어머니 말씀이 살아난다.

-우애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봐도 내외분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평생 말다툼 한번 없는 무풍의 삶으로 꾸려 가섰다. 손수 빚은 누룩을 깔아 동동주를 떠내어 아버지 밥상에 반주로 올리시던 어머니. 맏이에서 막내까지 순차적으로 여덟이서 벌린 손을 생각해 보면 금고조차 바닥났을 일이다. 추석 전날이면 팔남매는 보름달처럼 빙둘러 앉아 송편을 빚었다. 크기와 모양도 제각각이어서 솔잎을 깔아 쪄낸 뒤 웃음은 명절내내 이어졌다. 아무런 막힘 없는 부모님에 대한 공간은 무한의 은혜로 살아 수시 드나들게 된다. 생각할수록 자애로운 평화가 자리하여 가슴 가득 아련한 젖냄새가 묻어남을 어쩌랴. 겨우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죽는 소리가 멎을 날 없는 우리 내외 앞에 이제야 아버지 어머니의 남다른 사랑을 남루한 모자이크로 그려낸다.우리네 부모님들은 공통적으로 남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봄, 여름, 가을 세 계절 그토록 열약한 환경에서 가꿔온 먹을거리가 벌써부터 자식몫으로 챙겨져 추석날 오기만을 손꼽았으니 말이다. 자식 입으로 들어가는 기쁨을 행복 중 으뜸으로 생각하는 부모님처럼 귀하고 향기나는 분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이번 명절은 앞 뒤 날짜를 헤아려 보면 연휴가 긴 펀 아닌가?제삿상에 절이나 꾸벅하고 자동차 엔진 켜는 일, 이 생각 저 핑계로 오히려 실망의 골이 깊지 않도록 귀향 품격도 생각해 봄직하다.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그대로인 것'피는 물보다 진함'을 사람들 대부분이 꼽는다. 부모 형제간, 고부간 혈액을 맑게 만들 뿌듯함도 바로'만남'에서부터 출발이니까.....

▲ 오병익
청주경산초교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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