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은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대전 둔산의 빈소를 찾아 조문을 했는데 많은 선후배 동문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새삼스레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 삼십 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캠퍼스를 누볐던 그 때의 학생들이 돌아가신 스승을 추모하며 소복하게 모여 있었다. 소주잔을 비우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에서 언제나 단아했던 여교수님의 제자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아, 인생은 끊임없이 깨달아가는 과정이구나.

기성권력에 대해 본능적 경계심(?)을 가지고 있는 나는 요즘 말로 '까칠한'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집안 내력이 불순하다거나 무슨 혁명적 발상하고는 관계없이 성격형성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쁘게 보면 반항적 심성이요, 좋게 보면 문제의식의 발로인데 이런 성격이 개인과 집단에의 동화에 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다. 소위 '무얼 그렇게 따지느냐'라는 핀잔을 들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본심을 몰라주는 그들이 야속할 뿐이다.

돌아가신 교수님은 아주 독보적인 분이었다. 이런 감상도 근래 들어서야 갖게 된 것이다. 1학년 때부터 마주친 교수님. 가지런한 단발머리에 희거나 검었던 -주로 검은색이었지만- 원피스, 어린 소녀와 같은 목소리, 흐트러짐 없이 진행되는 강의, 나는 거기에 숨이 막혔다. 막연한 거부감이 들었다. 이게 대학 생활이란 말인가. 낭만도 여유도 찾을 수 없는 딱딱한 강의실,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런 인연이 전공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철없던 시절, 내가 꿈꾸었던 상아탑은 그렇게 무너져가고 말았다.

2년 전, 우연히 교수님을 뵈었다. 글을 쓰는 친구가 대학이 제정한 문학상을 수상하고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여전히 정갈한 모습, 정중히 인사를 드렸더니 무슨 일을 하는지 묻고는 따뜻하게 격려해주시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밥 한 그릇을 드시고 제자들이 불편할까 먼저 일어나시던 뒷모습에서 참스승의 존재를 보았으니 이 또한 때늦은 깨달음이라.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만만찮게 나온 밥값을 팔십 노구의 스승께서 계산하셨다니 그 음덕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갖가지 일화가 많다. 제자들의 취직에 소매를 걷어붙인 것은 물론 여성이라는 장점을 살려 잔일을 챙겨주셨다는 여러 친구들의 증언. 빈소에서 만난 어떤 후배는 사회복지사업에 종사하는 자신에게 옷 한 벌 사 입으라고 돈을 보내주시어 오늘 가시는 길, 그 옷을 입고 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은퇴하신 지 20년이 지났으나 온기처럼 남아있는 스승의 그늘, 그 빈자리가 얼마나 컸기에 오십 육십을 바라보는 장년의 제자들이 한달음에 달려왔을까. 사랑에 목말랐으나 스승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나의 강퍅함이 새삼 원망스럽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빈 들판이,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산자락이 가을을 알리고 있는데 홀연히 하늘나라로 가신 교수님을 생각하며 나의 삶을 돌아본다.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누구에겐가 단 한 순간이라도 가슴 따뜻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면 행복할 것 같다. 하나도 남김없이 그저 빈손으로 왔다간다 하더라도.

▲ 김홍성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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