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편> 방갈리 포구는 동학도 거대 墓

▲방길리 포구의 현재 모습. 아산 포구를 출발한 예포의 동학혁명군을 실은 배가 태안 동헌에 갇힌
동학지도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방갈리 포구에 도착했다. 오른쪽 아래는 동학혁명군 출신인 문장준, 조석헌이 기록한 역사문헌. 내포 동학의 움직임이 소상하게 담겨 있다.

태안의 동학사는 경주로부터 직간접으로 유입된 동학 포교사, 9월 기포를 전후한 관아 습격, 관군과 일본군 유회군(儒會軍)의 동학혁명군에 대한 잔혹한 토벌전을 든다.
태안의 백화산 어귀 교장(絞杖)바위 아래에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세워졌다.
이는 동학혁명 지도자의 후손으로 이 지역의 동학혁명사를 연구해 온 문원덕 씨의 노력이 뒷받침되기도 했지만, 그만큼 태안 지역의 동학혁명사는 원한이 사무쳤던 것이다.
뒤를 이어 문영식(52) 씨가 이 지역의 동학혁명사를 연구와 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다. 이번 답사는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전국서 가장 잔혹한 역사의 현장

&amp;amp;amp;amp;ldquo;태안군 장작리에 사는 윤씨 부인은 남편이 동학한 죄로 읍북(邑北) 사정전(射亭前) 개구랑목에서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윤 씨는 남편의 시체를 거두어 하관하고 나자 무덤에 뛰어 들어 곁에서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자결했다.&amp;amp;amp;amp;rdquo;이는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 교인이 쓴 실화소설 &amp;amp;amp;amp;lsquo;동학군의 아내&amp;amp;amp;amp;rsquo;의 내용이다. 실제 답사 때 태안 서산 지방에서는 &amp;amp;amp;amp;lsquo;작두 참수(斬首)&amp;amp;amp;amp;rsquo;라는 전국에서 가장 잔혹한 역사의 현장을 만나게 된다.

동학혁명 당시 홍성전투에서 관&amp;amp;amp;amp;middot;왜군에 패한 동학군은 서해안 쪽으로 쫓기다가 수차례에 걸쳐 학살을 당하게 된다. 태안 군아를 중심으로 태안여고 앞 개울의 &amp;amp;amp;amp;lsquo;개구랑목 시체더미&amp;amp;amp;amp;rsquo;뿐만 아니라 샘골 마을, 남문리 냇가, 정주내 등 여러 곳에서 관 일본 유회군의 살육 방화 부녀자 겁탈 등 가혹한 참극이 빚어졌던 것이다.

태안 지역의 동학활동 기록은 조석헌 문장준이 서술한 &amp;amp;amp;amp;lsquo;역사&amp;amp;amp;amp;rsquo;에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지는데, 당시 관아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은 어느 지방보다 가혹했다. 일찍부터 동학교도들의 활발한 움직임을 감지한 태안군수 신백희(申百熙)는 중앙 정부에 군사를 요청하였고, 순무사 김경제(金景濟)가 내려와 진두지휘하여 동학 두령급 30여 명을 옥에 가두어 가혹한 매질로 생사를 헤매는 지경이 되었다.

▲목애당. 태안 동헌의 한 건물로 동학혁명 당시 탄압의 중심 장소가 되었다.

동학혁명군 지도자 처형이 알려지자 위기에 처한 동학교도들은 급박하게 구출 작전에 나서게 된다. 9월 그믐날, 아산 포구를 떠난 수십 척의 배가 방갈리 포구(학암포)에 닿을 내리고, 미리 기다리던 방갈리 근동의 동학도들이 이에 합세했다. 기수대장에 안현묵, 서부대장에 박정백, 북부대장에 이치영으로 대오를 편성해 놓았을 만큼 치밀했다.
동학혁명군은 밤새 걸어서 오십 여리 떨어진 태안 뒷산 백화산으로 숨어들었다. 이튿날, 장터에는 원북면 방갈리에서 온 동학혁명군 뿐만 아니라 이원면 포지리, 근흥면 수룡리, 남면, 안면도 등 사방에서 동학교도들이 모여들었다. 박희인 대접주의 함성으로 성난 동학도들이 군아에 몰려가 옥에 갇혀있던 도인들을 구출하고 군수 신백희와 순무사 김경제 및 군 아속의 목을 쳤다. 태안 동학혁명군의 움직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동학교도는 들불처럼 번져

방갈리 포구는 해수욕장을 낀 포구 동네는 이미 많은 집들이 들어서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사나운 3월 바람을 머금은 물결이 거칠게 모래펄을 핥고 있었다. 이 지역의 동학은 장현리 최형순(崔亨淳)이 경주 최 씨로, 경주에 시제를 다니면서 1890년에 최시형으로부터 직접 동학을 전수 받아 포덕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형순 대접주의 포덕으로 서산 태안 등 근방에 동학교도 수가 들불처럼 번져갔다. 30여명의 동학두령이 태안군아 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amp;amp;amp;amp;ldquo;방갈리 문장로(文章魯)의 집에는 접주 장성국 김군집 최맹춘 안재엽 문장준, 문장혁 도집이 모였다&amp;amp;amp;amp;rdquo;는 기록이 보인다. 접주 급 6 명이 모인 사실은 이 지역의 동학 교세가 엄청나게 성했음을 보여준다. 이 지역 포교는 최형순 대접주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애석하게도 1892 년에 병사하였고, 이듬 해에는 예산의 박희인이 그릇 장수로 변장하여 방갈리에 들어와 조운삼(曺雲三) 문장준 문장로 문구석 등을 입도 시킨다.

그러면 이 지역에 동학교도가 성할 수 있었던 까닭이 뭘까. 예로부터 너른 들판을 끼고, 풍부한 어장, 중국의 난파된 배와 장사꾼 사신들이 빈번하게 드나들던 항구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그만큼 수탈도 극심했던 것이다.
태안 군아를 치던 날, 서산에서도 관아를 공격하여 군수 박정기와 이방 송봉훈을 참수하고 인부를 압수하고, 문서를 불사르고 군기와 재물과 곡식을 접수하여 진을 쳐서 이 지역은 이미 동학의 세상이었다.

▲태안 백화산 교장바위 아래에 자리한 동학혁명위령탑. 전국에서 가장 먼저 건립되었다.
피로 물든 백화산 교장바위

22 일에 이르러 태안 동학혁명군은 태안읍을 출발하여 서산을 경유 하면서 점차 수가 늘었고, 해미면 귀밀리에 진을 치면서 다시 수효가 늘어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해미 승전곡에서 관군 일본군 유회군 연합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고, 신례원 관작리 전투에서 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내포의 동학혁명 대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홍주성을 치기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홍주성에는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크게 타격을 입은 동학혁명군은 기기 시작하고, 관군 일본군 유회군의 전공(戰功) 다툼의 추격전이 전개된다.

동학혁명군은 해미 구산성과 저성에서, 서산 매현(梅峴)에서 연달아 패한다. 태안으로 돌아왔으나 관 일 유회군의 습격을 받아 수많은 동학혁명군이 포로가 되었고, 백화산 &amp;amp;amp;amp;lsquo;교장바위&amp;amp;amp;amp;rsquo;에서 교수형 총살형 타살로 바위를 붉은 피로 물들였다. 이 싸움 끝에 동학혁명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쫓기게 된다. 근흥면 수룡리 토성산(土城山) 전투에서는 수많은 동학군을 학살하고 자신들의 전공을 보여주기 위해 작두로 머리를 잘라 이 지역 동학교도의 집에 보관 했다는 증언을 이 마을 동학 후손 이태화(75세) 노인이 들려주었다.

당시 이곳에서 사용하던 작두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었다고 전한다.
이원면 사창 3리 목네미샘에서도 목이 없는 시신을 샘에 오랫동안 방치했다. 이보다 2km 쯤 떨어진 관리의 통개에서도 78명의 동학혁명군이 관군과 유회군에 의해 학살되었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