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다 보면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를 나쁜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산다. 살인강도도 세상 탓이지 제가 못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사람은 적어도 무엇이 수치인지를 아는 것으로 보아도 된다. 짐승만도 못한 놈 이라는 욕을 먹는 자는 분명 사람이 못할 짓을 범한 탓으로 그런 욕을 먹는다.
분명 사람은 짐승과는 달라야 한다. 참새는 참새의 길이 있고 돼지는 돼지의 길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모든 짐승들은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유독 사람만이 부끄러워할 줄을 안다. 성현은 사람이라면 사람다운 길을 걸어가라고 한다.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을 우리는 덕(德)이라 한다.
그래서 오직 덕으로 살라 한다. 덕이란 무엇인가? 두루 이롭게 하면 덕이다. 나만 잘 되고 남을 해치면 곧 부덕(不德)이 된다. 이러한 덕을 떠나지 말라고 성현은 부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덕을 말로만 하지 실지로 행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등치고 간을 앗아가는 세상이라고 푸념한다. 이렇게 푸념하지 말고 나부터 남을 이롭게 하면 된다. 여기서 이롭다는 것을 이익(利益) 따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의로운 것을 통하여 아름다운 말로 헤아리면 된다.
이해상관(利害相關)으로 맺어지면 뒤끝은 항상 나쁜 꼴로 마감된다. 서로 이익을 탐하고 손해를 안 보려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덕으로 사람과 사람이 맺어지면 그럴 리가 없다. 사랑의 끈으로 묶이는 까닭이다. 그래서 덕은 인(仁)에 의지해야 한다. 인(仁)이란 무엇인가? 남을 먼저 사랑할 때 인(仁)은 확보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사랑해 주면 너를 사랑해 주마고 주장한다. 이것은 사랑을 이로움과 해로움으로 저울질 하는 경우이다. 마담뚜의 중매사업 등은 바로 인(仁)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이(利)해(害)의 저울질이다. 참으로 인(仁)에 의지한다면 예(藝)에 노닐게 된다. 옛날의 육예(六藝)가 아무리 낡았다 해도 예악(藝樂)은 여전히 무한한 의미를 간직한다.
예(藝)란 무엇인가? 나를 엄하게 다스리고 남을 너그럽게 분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악(樂)이란 무엇인가? 마음속의 만족을 누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예악(藝樂)에 노닐면 이해(利害)상관의 저울질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언제나 어긋나기를 좋아한다. 덕(德)이 선(先)인줄 알면서도 멀리하고 인(仁)이 참다운 사랑인줄 알면서도 멀리하고 예(藝)가 우리를 편하게 하는 것을 알면서도 멀리한다.
그저 무엇이 이익이 되고 무엇이 손해인가를 따져 살피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잔인하고 영악하다. 그러나 인간은 부끄러워할 줄을 아니까 성현들의 말씀을 들으면 뉘우칠 수가 있다. 뉘우친다는 것은 깨닿는 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다. 사람의 두뇌가 한결같은 것은 분명 아니다. 좋은 머리도 있고 처진 머리도 있으며 나쁜 머리도 있게 마련이다. 세상이란 바보나 천치만 있어도 망하지만 천재만 있어도 망하고야 만다. 보통 수준의 두뇌들이 있어서 세상은 그래도 유지되는 법이다. 참나무가 단단하다고 기둥을 세우면 벌레가 파먹어 무너지게 마련이다. 기둥이나 대들보는 소나무가 제격인 것이다. 사람도 쓸모에 따라 쓰이게 마련이다. 무턱대고 음악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화가가 되는 것도 아니며 의사나 철학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소질과 능력에 맞게 가르치고 터득하게 되면 가장 적절한 교육이다. 무엇이든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난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이 되는 길을 배우려고 분발하지 않으면 개발해 주지 않는다. 알면서도 말을 못하는 경우가 아니면 말을 일러주지 않는다. 한 모서리를 가르쳐 주면 나머지 세 모서리를 알아챌 만큼 반응하지 않으면 더는 가르치지 않는다. 라고 성현들은 말한다. 마음의 눈을 열어 스스로 살피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면 사람다운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