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집안을 찾고 뼈대를 찾는 버릇이 있다. 옛날처럼 양반이나 상것을 찾아 차별하자는 것이 아니라 집안이 제대로 되어 있는가를 알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버릇이 있다. 된 사람은 집 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올빼미 같은 놈이란 욕설이 있다. 올빼미 새끼가 배가 고프면 품어주는 어미의 배바지를 삽시간에 쪼아 뱃속의 창자를 찍어 삼켜서 어미를 잡아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올빼미 같은 놈이란 욕설은 부모를 몰라보고 조상을 몰라보는 놈이란 욕이 된다.
죽은 사람만 조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부모 역시 내 조상인 것이다. 부모의 부모가 조상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흙 속에 묻힌 조상을 모신다는 것은 결국 부모를 잘 모신다는 마음과 통한다. 아마도 이러한 마음을 환기 시키려고 웃어른들께서 조상을 신중히 여기라고 귀띔을 하는 셈이다.
병정개미가 풀밭에서 전쟁을 벌이는 꼴을 보고 사람들은 지독하다고 흉을 본다. 참으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흉보는 꼴과 같다. 왜냐하면 만물 중에서 사람만큼 잔인한 전쟁을 하는 동물은 없기 때문이다. 별의별 핑계나 구실을 붙여서 적을 만들어 놓고 목숨을 거는 전쟁을 인간은 한없이 되풀이해 왔다. 몸으로 전쟁을 했고 활이나 칼로 전쟁을 했고 총이나 대포로 전쟁을 하다가 이제는 잠수함과 비행기 그리고 미사일로 전쟁을 한다. 수백 명이 죽다가 수천 명이 죽고 이제는 수만 명이 죽어나는 전쟁을 벌이는 기술을 인간은 갖추고 으르렁댄다.
며칠 전의 일이다. 단군 할아버지의 한 핏줄을 타고난 동족이면서도 생각과 사상이 다르다 하여 이북에서는 남한의 연평도에 무차별하게 이백 발에 가까운 대포를 쏘아댔다. 순식간에 섬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고 우리 측에서도 북한 쪽으로 오십여 발을 쏘았다고 한다. 다행히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무엇이든 전쟁을 좋아하면 망하고 만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느 날엔가 전쟁 탓으로 스스로 자멸하고야 말는지 모른다. 이러한 근심은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당연한 사실일 것이다.
학은 천 년을 누리다 죽음을 맞이하면 노래를 부르고 마지막 순간을 맞는다고 한다. 그러한 노래를 학의 울음이라고 하지만 하늘이 준 명(命)에 대한 순종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난초 중에서도 가장 진화가 빠른 종(種)은 죽음을 앞두게 되면 마지막 꽃을 피워 짙은 향기를 천공(天空)에 뿜는다고 한다. 이러한 향기는 천수(天壽)를 누리다 간다는 징표일 것이다. 사람 역시 명(命 )대로 살다가 명이 다 되어 간다면 죽음을 한탄할 것은 없다. 만물은 다 있게 되었으면 없어지게 되는 운명을 타고 난다. 그러나 몹쓸 병(病)에 걸리면 생목숨이 앗겨지게 되는 것이므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또한 본인의 운명(運命)이니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등치고 간 내먹는 사람이라는 속담이 있다. 그런 사람은 어떤 무기를 지니고 그런 끔찍한 짓을 하는 것일까? 되지도 않은 말을 하여 사람을 아프게 할 때 세치의 혀는 괴변(怪?)을 늘어놓는다. 해서 사람은 혀 때문에 죽고 곰은 쓸개 때문에 죽는다고 하였는가 보다. 억지로 일을 꾸며서 밀어붙이는 경우에는 힘 하나만 믿고 뭇 사람을 못살게 하는 폭력이 세상을 한 입의 고깃덩이처럼 뭉개려고 덤빈다. 괴변(怪?)이나 폭력이 날뛰면 세상은 어지러워지고 결국 너도 망하고 나도 망해 버리는 난리가 세상을 덮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신(神)을 팔아먹는 괴한들이 나타나 순진한 사람들을 울리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마련이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사교(邪敎)가 솟아나 세상을 속이는 환란이 이어지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마음 놓고 하루를 보내기가 어렵게 되어 버린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세상을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를 멀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괴변이나 폭력이나 난리나 귀신 등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하는가? 내 살기에 바빠서 일까? 아니면 그러한 현실 세계에 면역이 되어 버린 것 일까? 언급할 가치가 하나도 없는 까닭일까? 허나 오로지 사람이 사람을 올바르게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하니까...!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