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이러한 속담은 종자가 좋으면 싹도 좋고 종자가 나쁘면 그 싹도 나쁘다는 말로 들릴 수가 있다. 본색은 못 속인다느니 본바탕이 어떻다느니 과거를 가지고 사람의 발목을 잡으려는 일들은 무수하게 많다. 요사이는 지방색을 따져 이렇고 저렇고 말이 많아 개인 이력서에 원적을 기재하지 않게 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살인자라고 해서 그 자식마저 살인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좌제라는 악법을 보면 마치 아버지가 살인을 하면 그 자식도 따라서 살인자가 되어 버리는 꼴처럼 범법자의 피붙이로 묶어 버린다. 사상범의 가족들은 연좌제의 족쇄 탓으로 아버지를 밝힐 수 없거나 삼촌이나 형제를 밝힐 수 없는 세상을 보내야 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는 심심찮게 드러난다. 요새는 그 연좌제란 것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중요한 요직에 등용될 때면 그러한 문제가 가시처럼 당사자들의 아픈 가슴을 찌르는 모양이다.
우리에게 숨어 있는 연좌제는 분단의 아픔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친척 중에 누구 하나가 빨갱이가 되어 있거나 자진 월북한 사람이 있으면 여러 가지의 불이익을 당해야 했던 시절은 연좌제의 맛을 본 사람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연좌제는 분명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이 사람을 믿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정당화해 준다. 그러니 사람들은 서로 못 믿게 되면 결국 서로 의심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사람을 제대로 돌봐 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올바른 일을 하고 싶어도 과거를 따져서 못하게 한다면 세상은 한을 짓고 험악해지고 만다. 험악한 세상은 흉흉해지고 그러면 사람은 사나워 진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면 순수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연좌제가 뿌렸던 눈물은 흘리지 않아도 될터이니까...!
돈밖에 모르는 사람은 돈에 눌려 질식을 하고 권력밖에 모르는 사람은 권력의 종이 되거나 놀아나 망신을 당한다. 명예나 출세만 탐하다 보면 사람이 추해져 길거리의 개들도 물려고 덤빈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면 낭패를 당하게 마련이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선 누울 때와 설 때를 알아야 한다. 두루 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홀로 사는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을 잘 어울리게 할 줄을 알아야 한다.
맨 밥은 목이 매여 먹을 수가 없는 것이고 싱거워도 침이 말라 입 안에서 넘어가지 않는 법이다. 어디 요리에만 간이 맞아야 하는가? 살아가는 일에도 간이 맞아야 한다. 너무 되어도 안 되고 너무 물러도 안 되며 너무 맵거나 짜거나 시어도 안 된다. 맛있는 음식이 식욕을 돋구듯이 맛있는 삶 또한 살맛이 나게 하는 법이다.
즐거움은 살맛을 낸다. 살맛을 내는 것을 흥이라고 한다. 흥이 나면 노래도 되고 춤도 된다. 사람은 무엇인가와 어울리고 싶어 말을 해야 하고 노래를 불러야 하며 춤을 추어야 한다. 흥을 내는 데에도 예(禮)가 있어야 한다. 예는 살맛을 맞춘다. 맛이 넘쳐도 탈이고 쳐져도 탈이다. 너무 짜면 쓰고 너무 싱거우면 심심하다. 예(禮)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간을 맞춰 준다. 가족의 입맛에 따라 간을 맞추느라 부엌의 어멈은 음식마다 손맛을 더한다. 그러면 음식을 장만한 어멈은 맛있게 먹는 가족들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그 어멈이 짓는 미소 같은 것이 바로 사회의 예(禮)인 것이다. 사랑을 주고받는 연인(戀人)처럼 이 세상을 노닐면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즐거움은 나하고 너를 우리가 되게 한다. 즐거움이란 맹물에 꿀을 타는 것과 같다. 삶을 꿀맛처럼 달게 하는 것을 우리는 즐거움 이라 한다. 즐거움은 인생을 행복하게 한다. 백년도 못사는 우리 인생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한 세상을 사는데 어찌 이런 저런 아픔이 없겠는가?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예(禮)로써 연좌제의 족쇄를 풀어야 한다.
꿀맛 나는 세상을 살아야 하니까...!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