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섯 살 무렵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초등학교에 가는 어린이는 누구보다 행운을 갖는다. 학교에 가면 지식을 배울 수 있을지언정 지혜를 터득하는 기회는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대여섯 살 때 듣는 슬기로운 이야기는 어느 보약보다 낫다는 말이 그래서 있는 셈이다. 학교에 가면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군밤처럼 구수할수록 좋다. 그리고 군밤이면 달아야 한다. 구수한 마음을 어려운 말로 성실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음이 달면 누가 싫어하겠느냐? 그러면 손자는 모두 좋아할 것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남을 달게 하는 마음은 믿음을 얻는다. 너 믿음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를 학교에 가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손자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사람을 알아보려면 사귀는 친구를 보면 안다. 도둑놈은 도둑놈과 친하고 사기꾼은 사기꾼과 사귄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은 훌륭한 사람과 사귄다. 그러니 나쁜 사람과 친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보아도 된다. '할아버지 나쁜 사람이 누군데?' 이렇게 손자가 묻는다. 남을 해치거나 해롭게 하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한단다. 이러한 할아버지의 해답에 고개를 끄덕이면 할아버지는 커서 학교에 갈 손자를 대견해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저놈이 중학을 가면 충(忠)을 말해주고 신(信)을 말해 주어야지···. 노인은 이렇게 다짐을 한다. 충이란 성(誠)을 말한다. 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나를 속이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신이란 무엇인가? 내가 남을 나처럼 여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놈하고 대화를 나눌 때 까지 살아있어야지. 이렇게 할아버지는 손자와 더불어 사는 삶을 즐거워한다.
대여섯살 무렵의 어린이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를 갖고 있다면 행복한 삶을 바라볼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되는 길을 처음부터 올바르게 가르쳐 줄 선생을 그러한 어린이는 모신 까닭이다.
사람이라면 성실과 신의를 갖춰야 한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고 말이 아니면 듣지를 마라. 이러한 속담은 분명 유구한 삶의 역사가 새겨놓은 진실의 비명(碑銘)임에 틀림없다.
세상에는 무수한 종족들이 있어서 수많은 문화와 역사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화와 역사들이 모조리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이면서도 사람이 아닌 것처럼 생각할 수 있고 행동 할 수 있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사람은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될 수도 있고 가장 천한 짐승처럼 타락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이러한 속담 때문인지 사람의 속을 떠보려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떤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입을 빌려 그 사람의 됨됨이를 점쳐 보려고 하는 경우 남의 입질에 오른 그 사람은 도마 위에 오른 생선이 될 수도 있다. 칼질을 잘못하면 상처를 내는 법이다. 만일 칼질을 마구잡이로 하면 자를 곳을 모르고 함부로 잘라 버려 칼질 당하는 것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버리는 경우를 면하기가 어렵다. 사람을 칼질하는 것 중에서 험담이 제일 무섭다. 험담하는 입은 난도질하는 칼잡이의 손과 같은 까닭이다. 험담은 주로 이해(利害) 문제로 일어난다.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생각은 항상 이해를 끈으로 해서 입질을 하게 된다. 나에게 좋은 일을 해준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나에게 나쁜 일을 행한 사람이면 나쁜 사람이란 생각을 지닌 사람의 입은 험담 할 수 있는 입이다. 이러한 험담은 주로 당사자가 없는 순간에 일어난다. 그래서 뒷말로 퍼져 입질에 오른 사람은 부당하게 저울질 당하고야 만다. 험담이나 뒷말을 밑천으로 사람을 저울질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못난 짓은 없다. 꼭 알아볼 일이 있으면 당사자를 만나 담판을 지을 것이지 남을 통해서 떠 볼 것은 없다. 사람이 하는 말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인지를 본인이 확인을 해야지 남의 조언을 받아 저울질을 하다보면 저울추가 두 개가 되어 저울 눈금은 어려워지고 마는 법이다. 이럴 때 할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뭐라고 말씀해 주셨을까···· !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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