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창] 김성수 충북대 교수
구월의 달력은 여지없이 올해도 변함없이 익숙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상하리 만큼 이런 저런 일들로 얼룩진 팔월의 달력은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자연재해와 인재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후에야 사라져간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을에는 사람들이 생각이 많아지고, 뒤를 돌아다보는 시간이라고도 한다. 이제껏 뒤를 돌아다 볼 겨를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리는 세월도 화살촉의 서슬 푸른 예리함으로 코로나와 태풍의 시절을 찢어갔다. 가을은 여름의 아린 상처를 조용히 마무리해야하는 정리정돈의 시간이다. 지난 세월이 그렇게 시고 쓰린 아픔을 주었더라도, 이내 그 시절은 현재의 우리의 기억에서 떠나야 한다.
가을에는 수 없이 많은 상념들이 텅 빈 가슴의 울림으로 높아져가는 하늘 아래 서러운 사람들이 이승과 저승을 잇는 노를 저어가고, 삶의 외로움은 높이 나는 철새의 날개 짓으로 쓸쓸함을 찾아든다. 가을에는 견디기 힘든 외로움이 우리 모두의 마음 강가 저편에서 어슬렁거린다. 저문 해의 역사를 거슬러 저어가는 사공의 노랫가락은 이렇게 떠나간 시간들을 뒤적이며 방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어간다. 가을은 그렇게 쓸쓸하고 외롭게 또 다가오고 있다.
과거는 현재에 있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온다는 기별도 보내오지 않았다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가야만 하는가! 현재는 단발마의 숨소리로 살아있고, 과거는 죽어 가는데, 올 것 같지 않은 미래는 무표정한 장승처럼 허연 이발만 드러내고 소리 없는 웃음으로 껄껄껄 세상을 비웃고 있다. 미친 듯이 여름 장마의 진흙탕 물에 탕탕거리며 굴러가는 세태를 반영한 사람들의 욕심은 위정자의 주판위에서 뒹굴고, 우리는 그 누구 하나의 잘못도 아닌 세상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우울한 모습으로 가을을 바라보고 있다.
시끄럽게 시장의 뱀 장사처럼 악다구니의 울부짖음으로 정치권을 향하여 아무런 의미 없는 단발마의 외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언론의 짝사랑에서 근엄함 목소리의 위정자의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은 시끄러운 세상을 귀마개 대신 익숙한 유행가의 소리로 귀를 막아버린다. 위정자는 그들에게 표를 던질 사람들의 욕심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몇 만원에 타협한 양심의 소리는 지하 깊이 누구도 파낼 수 없는 곳에 묻어버리고, 어쩔 수 없이 빼앗긴 내 재산의 일부라 생각하는 이기심은 길바닥에 떨어진 동전닢을 줍기 위해 약삭빠른 눈알을 굴린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각자는 주머니 속에서 열손가락도 모자란 이해타산을 따지고 있다. 헐렁하게 셈을 치루는 손가락은 이미 스스로 독립하여 인공지능을 갖게 되고 그 지능으로 각자를 위한 어리석은 셈을 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숨겨놓은 땀방울 젖지 않은 돈다발은 지독한 썩는 냄새를 풍기고 있다. 거리에는 그 냄새를 사랑하는 승냥이들이 이리저리 어슬렁거리며 나다니고 있다.
인간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무기와 세균으로 스스로 자멸하려 하고 있다. 세상에 적의 생명만 앗아가는 무기는 없다. 내 손에 있던 무기가 적의 손에 들어가면 그 무기에 의해 나의 생명이 사라진다. 인간은 어디서부터 잘못 프로그램 되어 이 세상을 이렇게 황무지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일까? 하나의 존재에 천사와 악마를 심어 놓고 자유의지라 부른 조물주가 직무유기를 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차원에서의 해석은 자명할지 몰라도, 현재 인간이 인지하는 차원에서의 세상에는 선과 악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 어수룩한 각자의 생각이라는 틀에 갇히어, 살아 있는 것인지 죽어 있는 것인지도 분간 못하는 영혼들이 가여운 계절이다.
가을이다! 가을에는 철새가 되어 휘영청 밝은 달밤을 가로지르는 날개 짓으로 자유로운 비상을 꿈꾼다. 때가 되면 웃자랐던 푸성귀도 시들해지는 갈색을 머리에 지고 메마른 눈빛으로 억지웃음을 버리고 사색에 잠긴다. 가을에는 굳이 주머니에서 동전을 세지 않아도 파란 하늘 높이 보이지 않는 낚시 줄을 드리우고 무상무념의 시간을 낚아도 좋을 것 같다. 가을에는 그저 무표정한 눈빛으로 우리의 쓸쓸한 모습을 바라다보는 시간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제 불어 올 가을 그 바람에 모든 시름을 놓아 버리는 것도 무심하게 나부끼는 검불처럼 여유가 그리운 시절이다. 이런 저런 일로 암울한 시절,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을 수 없이 되뇌며 가을을 걷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