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회 깊은 3.1절 92주년
-감회 깊은 3.1절 92주년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1일 정오를 기해 벌어진 민족해방운동인 3.1운동은 후에 일제의 무단통치(헌병경찰통치)를 교묘한 문화통치로 전환케 했다. 그리고 국내외적으로 자주독립의 입지를 다지면서 상해임시정부 수립과 무장독립투쟁 등에 영향을 주었다. 기미년 만세운동이 발발한 그해 말까지 전국에서는 2000만 동포의 절반인 1000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전국 232개 군 중에서 229개 군에서 3200여회의 만세시위와 무장항쟁이 전개됐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피해는 컸다. 7500여 명이 사망했고, 1만 6000여 명이 부상했으며, 4만 6000여 명이 투옥됐다. 따라서 3.1운동은 자유. 독립. 민족자결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역사의 교훈을 실증한 '한민족 자존의 금자탑'으로 영원불멸할 것이다.
우리가 이같은 3.1운동을 기리면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운동의 발단이 된 종교 간의 화합과 단결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등장한 '민족자결'의 구호는 일본제국주의 심장인 동경에서 한국 유학생 200여 명이 '2.28독립선언'을 감행하는 동인이 됐고, 이 소식은 선언서와 함께 국내로 들어와 당시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던 종교지도자와 학생들에게 자극을 줬다.
-종교인은 국민 수범돼야
3.1운동의 장을 열게 한 데는 종교 지도자 간의 의기투합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민족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동학의 뒤를 이은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와 기독교 지도자 이승훈이 연합하여 독립선언을 합의했고, 여기에 불교계의 한용훈과 학생대표들이 대거 동참함으로써 민족연합이 형성됐으며, 민족대표가 결성, 파고다 공원에서 만세시위로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3.1운동은 퍼져 나갔다. 3.1독립선언서 서명자는 천도교측 15명, 기독교측 16명, 불교측 2명 등 33명이었고 천도교 운영 보성사에서 2만 1000매가 인쇄되어 2월28일부터 전국으로 전달, 배포됐다. 민족의 독립이라는 명제 앞에 종교가 종파를 초월한 단결상을 보여주어 만고의 귀감이 되었다 하겠다.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의 단합된 활약상은 (후에 일부 변절자가 나왔지만)오늘의 우리 종교지도자에게 묵언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다종교 공존시대지만 일부 종교 간에는 간단없이 갈등을 빚고 있다. 일부 종교 내에서는 주도권 다툼과 범법자까지 속출하고 있다. 이래서는 안된다. 종교인들이 국민들의 등불이 돼야 하고 단결과 화합의 구심점이 돼야 한다. 북한의 독재체제 종말에도 기여해야 한다. 3.1운동 당시 종교 지도자의 '종파초월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이것이 민족의 정언적 명령이다.
/김춘길 본보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