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칼럼] 오병익 전 충청북도단재교육연수원장

'사람 만들고 또 사람이 된다는 건 기다림의 풀무질이다. 많이 힘들었구나. 얘들아, 너희만 그런 게 아니야. 부모님, 선생님 모두 아프단다.' 청소년포럼(충청북도교육삼락회)에서 필자가 강조한 발표내용 중 일부다. 우린 어떤 실수를 가장 억울해 할까?

6~70년대 동네 골목은 청소년 만남·놀이·회의·경연·싸움·화해·질서 등 문화와 인간관계 촉매제 역할 등 다목적 장소였다. 빨간색 경고 '낙서금지' 네 글자 아래 '누구누구 어쩌구 저쩌구'이해불가 그림까지 웃음의 표적이었다. 요즘은 길고양이 울음소리와 순찰 발자국 소리만 들릴 뿐, 마을 사람조차 쭈뼛거리는 위험 구역 신세다. 맘껏 뛰며 '숨기장난·말 타기·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즐기던 아이들 전용 장소가 그 면적만큼 줄어 청소년 사각에 점령 됐다.

코로나 관련 우리교육은 원격을 일찌감치 앞당겼다. 학부모 대부분 '비대면 학습'으론 큰 일 나겠다 싶어 좌불안석해왔다. 그러잖아도 장기간 마스크에 묶였던 자녀들 문화는 전부 사이버 중심이다. 모바일·온라인을 통한 언어폭력, 집단 따돌림은 장소와 시각의 다양화와 부딪쳐 더 심각하다. 폭력 발생 때마다 학교별로 다른 판단에 형평성 문제가 불거진다. 내 자식이 '그럴 리 없다'며 진짜 환부를 묻은 채 무조건 상대아이 일방 가해처럼 분쟁을 키우기도 하지만 대부분 중심 학교장 자체 화해로 종료된다.

가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지역교육지원청)회부 사안인 경우 불리한 판세를 느낄 땐 '누가 이기나 해보자'며 '송사(訟事)'까지 무방비로 들이댄다. 법리상 인용될 가능성이 희박할수록 피해망상은 커 학부모 폭력을 방불케 한다. 그걸 빌미로 교권의 깊은 간섭과 시시콜콜한 덤터기를 쓰는 건 아닌지 두렵다.           

아이들마다 성격, 공부와 생활방식, 속도도 제 각각이다. 죽자고 뛰는 데 설렁설렁 걸어갈 수 있다. 그걸 인정해야 비로소 트인다. 마치 동물을 훈련시키듯 하나의 통일된 공식만 강요하니 자연히 실패를 숨길 일 쯤 많을 뿐더러 '부모님께 혼난다'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다. 어른들은 감당키 힘든 주문만 닦달하고 그럴 때마다 "싫어요, 안 해요, 창피해요"를 익숙하게 대꾸한다. "또 실수하면 그냥 안 둘 거야." 아이는 부모와 소통을 닫고 존재감마저 상실한 채 삐딱선을 탄다. 뭐든 터놓고 말할 보루를 잃었다고 판단할 경우 자포자기와 함께 밖으로 나돈다. 

몇 개월 전,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을 달궜던 청주 모 중학생의 무차별 집단 폭행(본보 4월1일자 보도)은 곧이곧대로 믿긴 어려우나 '담뱃불 …' 차마 해선 안 될 끔찍한 범죄였다. 처음에는 재미삼아 시작한 것이 시나브로 혐오를 키우는 게 문제다. 선생님 역시 삼삼오오 맞닥뜨릴 때마다 사사건건 학생 인권을 침해할 순 없다. 자식농사의 풍·흉작, 순전히 '부모님 손'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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