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을 따라 물을 타고 떠내려 온 진달래가 시냇물에 이르러 누렇게 떠서 떠 있는 장미꽃을 만났다. 진달래가 왜 물을 따라 마음 편히 떠나지 않고 이렇게 멀뚱멀뚱 머뭇거리느냐고 장미에게 물었다. 그러나 장미는 울상을 하면서 어디를 갈지를 몰라 이렇게 맴만 돈다고 서글퍼했다. 그 말을 들은 진달래가 물속이든 바람속이든 결국 흙으로 가서 제 뿌리를 찾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장미에게 의아해 물었다. 진달래의 말을 들은 장미는 꽃병에 꽂혔다가 버려진 꽃의 설움을 몰라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며 산천의 물을 타고 떠내려 온 진달래를 부러워했다. 왜냐하면 진달래는 살아있는 진달래 나뭇가지에 필 만큼 피어 있다가 질 때가 되어 떨어져 자기를 피게 한 뿌리를 알 수 있지만 장미꽃은 꺾여서 꽃가게로 팔려와 다시 어느 집으로 팔려가서 며칠 꽃병에 꽂혀 있다가 버림을 받았으므로 자기를 피워준 뿌리를 잃어버려 어디로 갈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어느 유치원 보모가 어린이들에게 조상의 의미를 가르쳐 주려고 들려준 한 토막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보모는 어린것들에게 조상이 왜 소중한가를 피부로 느끼게 해준 셈이다. 뿌리를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리면 생명이 이어지지 못함을 초목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꺾인 나뭇가지는 다시는 잎이나 꽃을 피우지 못한다. 그 나뭇가지는 뿌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조상을 기억하고 소중히 모셔야 하는가? 우리의 조상은 우리의 뿌리인 까닭이다. 돌아가신 부모가 어제 떨어진 꽃잎이라면 지금 살아있는 우리는 내일 떨어질 꽃잎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후손들은 모레가 되면 떨어질 꽃봉오리일 수도 있는 일이다. 사람의 목숨을 피고 지는 꽃으로 여긴다면 우리의 조상이란 세세 년년 피고 지는 꽃의 뿌리를 확인하게 하는 셈이다. 이러한 확인은 곧 목숨을 태어나게 해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통한다. 이런 마음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에 조상을 모시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게 된다. 인간은 조상의 돌아가신 날을 기억했다가 그날이 되면 그 뿌리에서 핀 꽃들이 모여 경건한 마음으로 지난 세월을 생각하고 이미 떠나간 사람의 체취를 다시 느끼면서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은혜를 고맙게 추스르는 순간을 가질 줄을 안다. 이러한 순간은 인간을 경건하게 한다.

경건해진 인간은 망나니처럼 함부로 생각하고 막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조상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인간이 되라고 애비는 자식에게 타이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조상을 귀신쯤으로 생각하여 잘 모시면 복을 주고 함부로 대하면 화를 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생명을 있게 해준 은혜를 감사할 것이며 삶의 길을 열어준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조상을 모시면 그만이다. 다만 모시는 마음이 진실해야하고 경건하여야 할 뿐 제사의 상차림을 얼마나 호화스럽게 했느냐는 문제가 되질 않는다. 그러므로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은 미신이 아니며 다만 인간다운 삶의 연속에서 생명의 뿌리를 고마워하는 마음일 뿐이다.

제사를 모실 때 마치 조상이 당신의 앞에 있는 것처럼 모셨다면 생명의 뿌리에 대한 경건한 마음의 표시로 이해한다면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신 날에는 집으로 돌아가 제사를 올려야한다. 무슨 일을 핑계대면서 바빠서 제사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하면 제사를 올리지 않은 것이니 뿌리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면 어찌 되겠는가? 시냇물에 누렇게 떠 있는 장미꽃과 다를 것이 없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제 아무리 바뀌어도 조상은 바뀌지 않는다. 생명의 보존과 승계의 법칙은 지구가 존재하는 한 변할 수가 없다. 우리가 지구를 떠나지 않는 한 생명을 잃지 않는 한 생명의 씨앗인 조상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한다. 조상을 모시는 경건한 마음속에는 자연스럽게 사랑함과 올바름의 삶이 겹치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다.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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