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창] 심의보 충북교육학회장·교육학박사
“페스트 환자가 되는 것은 피곤한 일이지만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은 더욱 피곤한 일이지요.”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La Peste·1947)에 나오는 이야기다. ‘페스트’ 대신에 ‘코로나19’를 대입해도 된다. 그러나 코로나에 감염된 사람만 고통받고 피곤한 것은 아니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힘들고 피곤하다. 감염되지 않았다는 상황이 안도감을 주지 못한다. 감염되지 않았어도 잠재적 감염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소통이 끊기고 폐쇄가 계속되면 피로감이 쌓인다. 실체가 없는 적과의 싸움은 항상 공포를 느끼게 한다. 공포는 일회성이지만 피로는 누적된다. 육체적 피로는 휴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정신적 피로는 쉽게 풀기 어렵다. 피로가 누적되면 불안을 넘어 분노와 같은 폭력으로 비화한다. 결국 타인과 외부에 근거 없는 증오심을 드러내게 된다. 공포에 대한 반응은 수동적이지만 극도의 피로감은 폭발성을 지닌다.
1년이 넘게 계속돼온 코로나 사태의 긴 터널이 이제 끝을 보이고 있다. 신규 확진자의 감소 추세가 계속되고 백신 접종으로 불안감이 점차 해소되고 있다. 그러나 이 사태를 통하여 우리는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직업군의 존재를 보기 시작했다. 소위 ‘필수 노동자’다. 간호사, 돌봄종사자, 택배기사 등의 종사자들이 우리의 생존에 중요한 직군의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 사태가 지나가도 여전히 ‘필수 노동자’라고 인정되며 치하받을 수 있을까?
이 시대가 주는 중요한 교훈은 능력주의에 기반한 성공과 실패, 또는 승자와 패자로 사람들을 나누는 것은 파괴적이라는 것이다. 능력주의를 존중하되 사회 곳곳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중요하며, 나의 안녕은 다른 사람의 안녕과 분리할 수 없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연대의식으로 모든 직군은 다 함께 소중하며 그들의 업무에 공정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민주사회의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는 가능성이다.
미국의 어느 대통령은 “우리는 대우받을 만하다(we deserve)”라는 말을 종종 썼다.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위험성이 있다. 사람들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면서, 승자의 특권 의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직 자신의 능력만으로 승자가 될 수 있을까? 가정이나 사회의 지지를 받지 않거나, 또는 우연한 행운이 없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능력자, 혹은 승자의 지위를 획득하기는 어렵다.
정계나 재계는 물론 사회 각층의 승자라 일컫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위험성은 자신의 능력에 따르는 부채 의식의 결여, 또는 사회적 연대와 책임의 몰각이다. 따라서 오늘의 사회는 승자의 겸허함과 연대의 윤리가 강조되어야 한다. 겸허함이란 자신의 승리가 혼자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겸허함의 윤리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경제적 보상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승자의 부채 의식과 책임 의식이다.
겸허함과 연대의 윤리를 지켜가는 능력주의는 우리 모두를 승자로 만든다. 승자 독식의 능력주의가 아닌, 겸허함과 연대의 윤리를 확산하는 노력으로부터 공동선의 씨앗은 뿌리를 내리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