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칼럼] 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내 이름은 지이야, 너는 누구? / 햇나물 쫀 텃새들 재잘거림 같다. / ‘예 예 선생님’ 따라하다 말고 / 누가 방귀 뀌었니? / 깜짝 놀라 ‘아니야 큰 거 했어’ / 필자의 동시 ‘1학년 1반’ 전문이다. 재잘거리고 깔깔대는 새로운 인연으로 학교가 들뜬 새 학년을 맞았다. 주지하듯 지난 해 두 학기를 도막낸 코로나 팬데믹, 졸업·입학식 운동회 학습발표회 현장체험학습 등 굵직한 교육과정이 어그러졌다. 친구와 오랜 단절로 원숭이 무리의 털 고르기가 부럽다. 담임 선생님과 추억은커녕 얼굴조차 희미하단다. ‘마스크, 입 다물어’ 오로지 ‘안 돼 시간 속’에서 버텨온 딱한 상황 아닌가.
그래서일까. 부쩍 스포츠 분야에 만연한 학교폭력의 격앙역시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 지체와 부진 전부를 피해자 탓으로 포장해 넘겼던 거다. 때리고 욕설을 퍼부어 실신할 때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복수를 노리다가도 관행이려니 아예 대꾸마저 못한 게 확인 됐잖은가. 흥미로운 건 학교 안팎의 전혀 다른 반응이다. ‘치미는 분노’ VS ‘숨겨진 팩트’ 로 뜨겁다. 어쨌거나 '창조적 인성' 뺀 미래란 본말전도일 뿐, 정답을 얻기 힘든 오랜 회임기간과 자율 역량 토양의 교육 특수성 때문일 게다. 농부 발자국 소리에 비례하는 농사의 풍흉처럼 ‘품을 수 없는 것까지 품을 수 있는 선생님’ 새 학년, 교육가족 모두 한결같은 희망인 건 분명하다.
임용고시만 잘 치면 교단에 설순 있어도 역할과 책무의 관통은 힘겹다는 얘기다. 사도(師道)란 ‘끽소리 말고 따라와’ 아닌 비록 조금 소란스러워도 개개인 감정이 살아있는 교육, 외형적인 화려함 보다 내적 견실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구성원 간 인간관계야 말로 중요한 변인이다. 학생과 담임, 담임 학부모, 교무실 행정실, 교사와 교감 교장 간 뭔가 흔쾌하지 않은 분위기일 경우, 교권추락 파열음의 후유증은 크다. 그러기에 학년 초 교육계획 일수록 밀어붙이기 식 아닌 합리적 토론을 즐겨야할 매뉴얼 1순위다.
1995년 지방자치제, 2007년 교육감 직선제 도입 후 양 기관 관계가 조마조마하다. 2년 전, 소위 ‘명문고 육성’으로 분별력이 흐려지는 바람에 격한 감정도 겪었다. 미래인재 육성 밑그림부터 확연하게 다르고 학생 급식비까지 다른 잣대로 맞서는 바람에 도민 원성도 빗발쳤다. 교육정책과 도정, 정치와 교육 셈법의 차이일까. 수면 아래로 내려앉긴 했으나 언제 분출할 휴화산 인지 묻고 싶다. 화려한 수식어 나열보다 꿈과 희망을 지필 새 학년 약속, 그 실세가 내 자녀란 걸 팽개쳐서는 안 될 이유다. 교육감·도지사 함께 팔을 걷어 ‘우아, 맛있다’ 급식 만족도부터 아이들 입으로 차고 넘쳐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