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낡은 인간상이니 이제는 엘리트라고 해야 새로운 인간형일까? 아니다. 양반과 상것이 차별이 추상같이 엄격했을 때 율곡은 첩의 소생이나 상것에게도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는 기회를 주고 양반이 되는 기회를 주자고 했다. 그러자 공맹을 앞세웠던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반대를 했었다. 이 문제를 놓고 보면 율곡은 트인 사람이었고 반대했던 무리들은 꽉 막혔던 사람들이다. 조선이 왜 망했던가? 양반과 상놈으로 나누는 잔인한 신분사회의 구조 탓으로 망했던 것이 아닌가. 율곡은 분명 선조 임금시대에 보기 드문 선각자였던 셈이다.
선각자는 앞을 내다보고 미리 갈 길을 정하는 사람이다. 선각자나 선구자에게는 현재와 미래를 무난히 연속시키는 앞을 보는 눈이 있다. 트인 사람은 그러한 눈을 간직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트인 사람은 낡은 인간상이 아니다. 그는 항상 새로운 인간이고 삶을 위하여 사랑함을 실천하고 그 사랑함을 위하여 올바름을 실천하는 인간이다.

꽉 막힌 사람을 꽁생원이라고 흉본다. 제 생각만 앞세우고 남의 속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치를 옹고집이라고 한다. 남의 허벅지를 긁적거리며 시원하다고 하는 사람을 넋 나간 푼수라고 한다. 꽁생원이든 옹고집이든 푼수든 다 같이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른다.

눈이 감기고 귀가 막혀서 제 속만 천하의 것으로 알고 저만을 위하여 담을 높이 쌓아 놓고 있기 때문에 물정을 몰라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트인 사람은 잘잘못을 안다. 나아가 크게 트인 사람은 잘한 것은 숨기고 잘못한 것은 드러내어 용서를 구하고 잘되게 고친다. 이렇게 마음과 몸을 가지도록 자신을 이겨내야 한다. 세상은 분명 확 트인 사람을 환영한다. 그렇게 트인 사람을 누가 멀리하고 싫어할 것인가!

확 트인 사람이 되는 비결이 있다. 비결이란 감추어져 있게 마련이지만 성인의 비결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성인의 말씀을 듣다가는 경쟁사회에서는 손해만 본다고 지레 피할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성인은 올바름과 이로움을 분별하게 하지만 생활 속의 이로움을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로움이 올바르면 좋다. 땀 흘려 얻은 이익은 자랑스럽고 훔쳐 얻은 이익은 부끄럽다.

이 얼마나 인간스런 성인인가? 투기나 복권이나 도둑질로 얻는 이익은 의롭지 못하지만 열심히 일해서 번 이익은 자랑스럽다. 성인은 결코 우리에게 맹물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감출 것 없이 살아라. 숨김없이 열심히 살아라. 깨쳐서 당당하게 살아라. 사람을 해치지 말고 도우며 살아라. 사람을 속이지 말고 믿어라. 그리고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라. 이렇게 사람이라면 저 스스로를 닦아 보라고 성인은 우리에게 당부한다. 결코 겁을 주거나 조건을 붙여서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의 덕목들이 중용(中庸)이라는 저울대로 있을 뿐이다.

확 트인 사람은 삶의 덕목을 저울처럼 삼는다. 꽉 막힌 사람을 저울질을 의심하지만 확 트인 사람은 저울질을 믿는다. 자신의 것을 먼저 단 다음 남의 것을 더 나가게 다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콩 한쪽을 둘이 나누어 먹을 때 큰 쪽을 남에게 먼저 권하는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본다. 이익을 덜어서 올바름을 사는 것이다. 상대편의 올바름을 사 놓으면 세상이 그 만큼 더 이로워 진다. 이처럼 트인 사람을 세상은 환영한다. 그래서 트인 사람은, 깨친 사람은 더욱 행복하고 더욱 즐겁고 더욱 빛나는 등불과도 같은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