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론] 김복회 전 오근장 동장 

동해의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며 그 모습을 드러낸다. 바다만 보면 환호성을 질렀는데 오늘은 푸른 바다가 가슴을 시리게 한다. 눈에 익은 거리를 지나니 마음은 더 착잡해 온다. 멀리 동생이 있는 두 번째 집이 눈에 들어온다. 봉안당에 들어서니 환한 동생사진이 우릴 반긴다. 사진을 바라보며 잘 지내고 있냐고, 보고 싶었다고 속울음을 삼키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동생이 하늘나라로 간지 벌써 3년이나 되었다. 교사 발령을 받고 이곳 강원도에서 맘고생하며 힘들게 살았다. 

거리도 멀다보니 친정집에도 자주 오지 못했었다. 그래도 휴가철만 되면 기차를 타고 온 가족이 동해 바다로 왔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자가용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제천서 기차를 갈아타고 많은 시간을 달려갔었다. 동해의 망상해수욕장에서 조카들과 행복하게 지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래도 휴가철만은 친정식구들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바다가 없는 곳에 살았던 우리 형제들은 동생과 함께 할 수 있는 이곳이 너무 좋았었다. 

그런데 동생과 제부는 성격이 맞지 않아 늘 다투며 살았다. 이번에도 동생을 보러 간다고 연락을 했더니 제부가 점심을 같이 하자고 했다. 그런데 코로나로 인원이 5명이 넘어서 함께 할 수 없다고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융통성 없는 사람하고 평생을 살다간 동생 생각에 진작 이혼을 시켰으면 이렇게 일찍 가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동생은 결혼 후 제부와 성격이 안 맞아 이혼하겠다고 언니인 필자에게 하소연 했었다. 그런데 그 때만해도 이혼을 한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였던 시절이었다. 전화도 하기 힘들었고, 거리도 멀어 자주 갈수도 없고 하여 편지를 수시로 써서 동생 맘을 달랬었다. 동생의 힘든 고통을 알아주지 못하고 부모님에게 이혼한 딸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오로지 그 생각밖에 없었다. 동생은 우리 시골 동네에서 1호 여자 대학생이었었다. 꿈도 많고 열정도 많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교육열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었다.

제부가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고 소통을 잘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사무치게 밀려온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조카들은 결혼 적령기가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부모의 평탄치 못한 삶의 영향이지 싶어 가슴이 저리다. 

동생은 늘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멀리 시집가서 자주 올수 없어 안타까워했고,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로 항상 걱정하며 사셨던 엄마다.

엄마도 가끔 이혼을 시키고 형제들과 가까이에서 살게 했으면 그렇게 일찍 가지는 않았을 거라며 때 늦은 후회도 종종 하신다. 

이런 엄마에게 동생은 천국에서 매달 용돈을 보내주고 있다. 동생의 연금을 받을 때마다 엄마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늘 품고 사신다. 아마 동생도 엄마에게 그렇게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널 만나서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했다고 꼭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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