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칼럼] 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 ·아동문학가
문 닫힌 폐교에서 종소리를 듣는다 / 군데군데 잡풀로 쓰다만 편지되어 돋았다 / 흑백사진 속 까까머리들 딱지치기 하다말고 운동장을 달렸다. / 필자의 동시 '가르침의 화음' 첫 연이다. 모 단체 주최 교육포럼에서 강사는 38년 중등 교직경험 중심으로 내용을 엮었다. 오묘한 학력과 인성 관계를 '돌이켜 보니 오류가 많아 부끄럽다'며 눈물을 펑펑 쏟는 바람에 참가자 여럿도 따라 울었다. 감동은 곧 필자에게도 닥쳤다. 초임시절, 개인 과목 별 목표점수를 정해 주고 그 점수를 쫒느라 선생님은커녕 훈련사 노릇으로 닦달한 거다. 이제 상군(깊은 곳을 잠수하여 수확하는 빼어난 해녀에 비유함)이 된 당시 제자들과 유독 잦은 만남 때마다 '스승의 은혜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을 빠지지 않고 불러 겸연쩍다. 세 번째 모임에서 나지막히 물었다. '선생님과 진한 추억은?' 합창하듯 '목표점수!' 후렴까지 해댔다. "일등, 일등" 너무 무안하여 '직함만 선생'이었다는 반성문마저 꿍친 채 웃음으로 버무렸다.
상담 주간의 허와 실
교직 퇴임 후 제자들을 통해 비로소 깬다. 교장실 중앙에 붙은 반별 성적 막대그래프를 높이느라 그 숱한 감동거리 하나를 못 만들어줬으니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미안하다. 70년대는 교육 여건까지 왜 그리 비참했는지 학습 자료라곤 T자·너덜너덜한 괘도·지구본 몇 점이 전부였다. 잦은 일숙직과 주번, 연·병가조차 그림의 떡이었다. 공백을 메울 강사·기간제도 모르고 살았다. 출장 날이면 반장 소리만 컸으나 칠판 빼곡하게 적힌 '떠든 사람' 공포는 언제나 "이번은 용서"로 미뤘다.
학부모 상담주간의 뒷담화를 들었다. '우리 애가 너무 드세어서…' '오히려 호통도 잘 받아내 는 바람에 인내와 포용을 배웁니다' 반면, 다른 선생님의 경우 인사도 끝나기 전 대뜸 '문제아' 뉘앙스로 언짢은 훈계를 늘리더란다. 재판장 앞 피의자처럼 입 한 번 벙끗 못했다며 궁시렁 거렸다. '설마, 그럴 리가?' 굉장히 뒤틀려 눈살부터 찌푸렸다. 동상상련(同病相憐)을 숨길 수 없었다. 그냥 경청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
배부른 소리
공교육 회복에 진땀 빼는 최고 선생님들까지 싸잡아 욕 먹인 거다. '인간애'를 저버린 사람이 현직 프리미엄만 앞세워 '못 해 먹겠다'면 배부른 소리다. 아무리 제도를 개선하고 교육과정을 바꿔봤자 무슨 소용일까. 아이 미래를 너무 일찍 단정하지 말라. 선생님 한 말씀으로 제자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 예나 제나 '잘난 선생님보다 어진 스승'을 안달한 이유다. 사도(師道) 그 실체는 '사랑' 아니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