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창] 김성수 충북대 교수 

바람도 색깔이 있나 보다. 바람도 목소리가 있나 보다. 유월의 한낮에 바람은 초록의 옷을 입고 유월의 나뭇가지에서 살랑이고 있다. 초록의 옷깃은 나뭇잎을 스치고는 이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새들의 노래로 총총 하늘을 날아간다.

바람이 돌아가는 어귀에는 가지각색의 벽들이 서 있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벽과 그저 돌로 쌓아 올린 돌담이 있고 얼기설기 나뭇가지로 엮어놓은 울타리도 있다. 붉은색 높은 벽에는 담쟁이가 새로이 덮여오는 짙푸른 잎들을 바라보면 그저 흐뭇한 웃음으로 거기에 여전히 매달려 있다.

바람은 그런 벽들을 휘돌아 세월을 기억한다. 그리고는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의 사이를 흥겨운 휘파람으로 쓴웃음 지으며 무심하게 흘러간다. 바람은 형태가 없다. 바람은 그렇게 자유로워야 바람이다. 바람을 가둔 것은 바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이다. 바람은 그렇게 허공을 떠다녀야 바람이다.

틀이라고 하는 것은 벽돌을 찍어내듯이 무엇인가에 영향을 주어서 원하는 형태를 갖추게 하는 도구이다. 바람이 틀에 갇히면 그저 움직임이 없는 공기다. 바람이 둥근 공에 갇히면 그 바람은 둥근 공이 될까? 틀에 가두어진다는 것은 살아가기 위한 적응인가? 그래서 현실에서는 조직에서 바람을 가두고 그 구속을 바람의 본질이라 강요하는가? 통제의 수단은 잔인하다. 조직을 위해 통제를 당하고 그 대가로 부자연스러운 안락함을 누리는가? 제약된 형태를 가진 바람은 색깔도 목소리도 없고 피부에 와닿는 섬세한 손길도 없다.

생각은 바람이다. 우리 각자의 생각은 자신의 고유한 빛깔과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생각은 틀에 묶이면 불편해지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긴 생각은 각자의 독특한 특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생각에 틀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누구나 생각의 틀이 다르다. 그 틀은 생물학적인 유전적인 영향을 무시할 수 없기도 하다. 살아가면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만들어지는 것이 또한 생각의 틀이다. 개인이 만들어가는 의식의 틀은 하나의 일생에 있어서 크게 변화하지 않는 것 같다. 대개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어찌 되었든 기존의 틀을 깨지 않고는 새로운 틀을 얻을 수가 없다. 이미 아는 것 또 가진 것이 많다고 믿는 자칭 능력자는 세월이 감에 따라 주위 사람들에게 잔소리(?)가 많아진다. 각자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참견이 많다.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인식을 판단의 기준으로 세상을 색안경 끼고 매의 눈으로 쳐다본다. 그 잔소리에 사람들이 다가올 수는 있는 것일까? 물론 나만의 소리를 내기 이전에 결단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소리를 내어 사람들이 멀어져 가면, 혼자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 된다.

거친 소리에 이질적으로 갈라진 시시비비는 모두를 기만하는 단세포적 삶의 집착일 뿐이다. 날카로운 기준에서 비워진 자리는 새로운 이질적인 존재로 채워지고야 만다. 삶은 그저 바람처럼 흘러가고 지나가야 하는데, 발끝에 채인 돌을 바라보며 돌이 있는 세상을 한탄한다. 절대 돌은 내 발을 차거나 시비를 건 적이 없다.

어떠한 형태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 그 자체가 우주의 한 부분이다. 더러운 것이 있어야 깨끗함도 존재한다. 비슷한 것이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있기에 구별된다. 삶은 그 자체가 그렇게 깨끗하다거나 더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다거나 슬픈 것도 아닌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바람으로 살 수는 없을까? 그저 형태도 없이 꽃밭에 가면 꽃이 되고, 숲속을 지날 때는 한 조각 나뭇잎이 되고, 그리고 하늘에 올라서는 형체 없는 구름이나 될 수는 없을까? 그러게 자유로울 때야 비로소 바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살아가는 그 자체가 틀이기에 영원히 바람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가슴에는 바람이 멈추어 있는가? 유월의 바람은 따가운 빛줄기를 타고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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