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칼럼] 오병익 전 충북단재교육연수원장·아동문학가
1975년 3월, 영동 용화초 새내기 교사가 / 반세기를 흘러 '기다림의 풀무질'을 정년으로 여미십니다. / '사람보다 더 중한 건 없다'며 / 타박 않는 사랑으로 낮추던 목청 / 혼자, 북풍을 싸안고 서 있을지언정 / 오는 햇볕만을 기다리지 않은 채 / 사랑·봉사·헌신으로 숙성해 온 송공(頌功)의 온유한 큰 빛… / 어쩜 그렇게 날개 달린 동심(童心)일 수가? / 어쩜 그렇게도 별나라에서 온 착한 아이일 수가? / 교육·봉사로 중독된 삶, 송문규 선생 교직정년 퇴임 축하 '그 이름은 큰 빛' 제목을 달아 필자가 쓴 송공의 글 일부다.
엊저녁 뉴스에서 낯익은 고관 출신이 법정을 나오며 전형적인 '땅 투기와 역(逆)기부'를 횡설수설 했다. 자식한테 물려준 편법 증여 관련 범죄였다. 송 선생의 국보급 인간애가 떠올랐다. 그는 생명을 살린 299회 헌혈 천사다. '혈액 성분 때문에 300회를 채우지 못했다'며 아쉬움도 컸으나 '부전자전'을 복기한 아들이 목표치를 보탰고 되레 아버지 기록을 추격 중이다. 그의 청소년 일기는 유독 시렸다. 20리 길 좌판으로 청주농고를 거둔 모성애, 졸업 전 취업부터 서두르던 그를 몇 날 며칠 구워삶아 교육대학 입학을 터주신 고3 이재일 은사의 태산 같은 빚 앞에서 속앓이도 깊었다.
천신만고 끝 현실이 된 '청년 교사'는 아이들 발자국 소리에 늘 설렜고 학부모 가난까지 얹힌 과제인 듯 저며 왔다. 하여, 방과 후엔 농업지도사처럼 유기 농법 작물재배를 조목조목 가르쳤다. 평생 부모님 봉양을 해오면서 41년 6개월 꼬박 무결점 개근, 아무래도 '송 페스탈로찌' 별칭으론 빈약하다. 정년 퇴임식장 하객을 유심히 살펴봤다. 대부분 경상도 쪽 사투리를 섞어 얼싸 안는 모습이 영락없는 첫 발령학교 학부모(村老)와 제자들이었다. '뷰티플, 송문규'란 고유라벨을 붙인 손수 담근 포도주에 선생님께 배운 원조 친환경 영동 농산물이라며 크고 작은 보따릴 풀어 북적거린 참석자 모두를 감동시켰으니 그 때 그 시절 송 선생의 인간적 품을 어찌 몽땅 헤아릴 수 있으랴.
이후, 줄곧 열다섯 단체 후원도 계속하면서 끝나지 않은 지역사회 사랑에 빠졌다. 다문화가정 위로와 이미자 한글지도, 청주시·청주교육지원청 공동 지원 사업 '봉황송 온마을돌봄공동체' 대표로 좌절 직전 아이들에게 찡한 돌봄 문화 수범사례를 쏟아내고 있다. 충북교육삼락회 자문위원, 경덕초 운영위원장, 봉명동 주민자치위원 등 포지션까지 흔쾌히 맡아 '생고생'중이다. 2년 목표한 '돌봄공동체 도서관'역시 여러 지인과 기관단체 협조로 다섯 달 쯤 당겨졌다며 기증된 3,000여 도서 분류에 점심을 넘긴 시각, 왠지 연시(戀詩)를 만난 듯 향기가 물씬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