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인간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범하면서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는가? 믿음의 소중함을 잃은 탓이고 올바른 삶의 이치를 잊은 탓이기도 하고 서로 친밀한 정을 나누는데 인색해진 탓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탓들로 가장 아픈 상처를 인간이 앓는 징후는 사람이 사람의 말을 믿지 않으려는 의심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세상만큼 무서운 세상은 없다. 말이 곧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행위로 이어진다면 어느 것 하나 사랑함으로 통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서로 주고받으면서도 그 말을 서로 못 믿어 무슨 증거로 담보를 잡아 두려는 세태를 이제는 아무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연하게 여긴다. 말보다 도장을 더 믿는 세상은 믿음과 올바름 그리고 친밀함이 모자란 결과이다.
무엇이 정말이고 무엇이 거짓말 일까? 말과 행동이 맞지 않을 때 거짓말이 되고 맞아들면 참말이 된다. 그래서 행동과 맞아들지 못할 말은 하지 않아야 하므로 말보다 침묵이 정직하다고 하는 것이다. 참말을 하면 오히려 믿지 못하고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결국 삶이 거짓투성이란 것을 증명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못살고 악한 사람이 잘 산다는 생각을 지니면서부터 인간은 악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할 줄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기가 쉽다. 세상이 모두 도둑의 소굴인데 누가 누구를 도둑이라고 흉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자탄하는 것은 얼마나 괴롭고 슬픈 일인가!
어느 놈 치고 털어 먼지 나지 않는 놈이 있느냐고 삿대질을 하는 인간 군상은 타락할 대로 타락해 무엇이 믿음이며 무엇이 올바름이고 무엇이 친밀함인가를 모른다. 이러한 망각의 탓으로 인간은 잔인한 동물이 되어 힘만 믿고 설치는 현실을 삶의 현장으로 만들어 내는 중이다. 믿음이 올바름에 가까우면 말은 행동으로 맞아든다. 공손함이 예에 가까우면 수치스러움이 멀어진다. 서로 함께 있는 사람이 친밀함을 잃지 않으면 그 보다 더 존경스러운 것은 없다. 화목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 큰 일이나 작은 일이 이러한 화목에서 비롯되지만 잘 안 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화목함을 알고 화목하려해도 예로써 행하지 않으면 잘 시행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수도 있고 무서울 수도 있다. 깊은 산 속에서 사람을 만나는 게 제일 무섭다고 말하는 산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강도가 되기도 하고 살인도 하며 남의 것을 빼앗아 제 것으로 훔치는 악한 마음을 간직할 수가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서로 경계하면서 눈치를 보려고 한다. 그러나 서로 수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알게 되면 굳은 얼굴을 풀고 미소를 지으면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기도 하고 고개를 숙여 서로 절을 하면서 삶의 안녕을 빈다. 이러한 인간의 마음씨는 예(禮)를 긍정하는 심리이다. 서로 정을 나누고 그 나눔이 지나치지 않아야 예가 살아서 삶의 생기를 북돋워준다.
오늘날 사람은 이용할 가치가 있으면 친한 척하고 그 가치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린다. 이는 서로 사이에 참된 예가 없어져 버린 탓이다. 이용당하는 삶은 항상 삭막하고 씁쓸한 법이다. 속마음은 꿍하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한 체하며 체면을 차리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삶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함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 아닌가. 오로지 사람의 참된 마음에 달려있다. 일체유심조인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