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창] 김성수 충북대교수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고자 한다. 이 광활한 우주에 행복하고 싶다는 것을 부정할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느 시대이고 어느 곳에서이든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행복하고자 한다. 그래서 생명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에든 여러 가지 형태의 전쟁이 존재한다. 그것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어떠한 형태로든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한다. 산다는 것이 그렇게 어쩌면 그렇게 잔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살아남기 위하여, 가지지 못한 자든 가진 자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갖기 위해 싸움을 하는 것이다. 전쟁에는 선의의 전쟁은 없다. 전쟁 그 속성 자체가 잔인해야 하는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가진 재산뿐만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빼앗는 속성은 잔인성을 배제할 수가 없다. 더 가진 자는 더 갖기 위한 웅대하고 원대한 꿈이라는 정복을 바탕으로 한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전쟁을 한다. 그렇게 그 꿈은 많은 생명을 도륙하고 존재하는 것들을 파괴하고 약탈한다. 결국, 다른 생명의 불행은 약탈자의 행복이 된다. 약육강식의 본질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만 보더라도 영원한 행복의 조건은 유지되지 않는다. 약탈로 얻은 행복이라서 파멸된 것이 아니다. 철옹성의 곡간을 침투하여 들어갈 자가 없었지만,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은 배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간의 지루함은 철옹성 안에서 분란을 가져온다. 결국, 그 곡간에 쌓였던 것들과 곡간이 없어져 버린다. 그들이 만들어 놓은 곡간으로 인하여 그 곡간을 노리는 적들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무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시간과 자연의 변화가 그들과 그들의 행복을 역사 속으로 결국에는 지워버린다.
인간은 선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베풀 수 있는 것은 가난뿐이다. 선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것도 그런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야 한다. 과연 인간은 그런 전제조건을 만들 수 있는 존재일까?
소수의 조직이든 국가든 다수가 결집 된 집단 형성되고 나면, 관계는 복잡해진다. 그 누구도 내 맘 같은 존재는 없다. 모두가 다 각자 서로 다른 이익을 생각하기에, 법이라는 틀이 필요하다. 그 틀은 모두의 행복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그 틀인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현상을 수학이라는 언어로 다 나타낼 수 없듯이, 인간의 복잡한 관계를 법이라는 틀에 담기는 불가능하다.
결국, 완벽하지 못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법은 통치의 수단으로 전락한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법은 존재의 이익을 위하여 타협과 경쟁을 통하여 해석되고 적용된다. 참으로 복잡하고 무서운 이무기로 변해버린 것이다. 선거철만 되면, 완장을 좋아하는 이들은 법이라는 칼을 들고 상대방을 위협한다. 슬프게도 법을 아는 이들로 법이 오염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면 너무 심한 해석일까? 행복의 전제조건이 행복을 파괴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변화의 시절이다! 완장을 원하는 이들이 서로를 자신만의 행복의 제물로 만들고자 한다. 과연 그들은 완장의 의미를 모를까? 그 완장은 자신만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자의 굴레라는 것을 알 것이다. 혹자는 권력은 누리는 자의 것이지 권력은 나누어주는 자의 것은 아니라고는 한다. 그러나 행복이란 속성은 누리는 자만의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는 자와 받는 자들의 것임은 분명하다.
영원히 유지되어 누릴 행복의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의 환경은 변화한다. 현재 여럿이 함께 누릴 수 있을 때, 나누어 함께 누리는 것이 행복의 본질인 것은 아닐까?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로서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것은 스스로 자멸을 자초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생명체는 홀로 존재할 수가 없다. 행복의 조건은 홀로서기가 아니다! 살아 있는 행복의 조건은 함께 누려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가을에 다양한 색들이 함께한 단풍이 아름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