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창] 김성수 충북대 교수
붉은 단풍이 흐드러진 길 위에는 가을이 길게 드리워져있다. 그 길 위에는 아직은 온기 있는 가을 햇살이 다소곳이 사박사박 내리고 있고, 그 햇살 위를 밟는 이들의 발길은 숨소리조차 멈추고 가을의 울림을 듣는다. 어느 시절이고 길은 생명체가 살아가는 모습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길들은 시절에 따라 형태가 변하기도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 바꾸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길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살아가는 모습의 화인이다.
세상에 만들어지지 않은 길은 없다.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이 살아감으로서 길을 만든다. 길을 만든다는 것은 물리적인 행위만은 아니다. 생각과 느낌에도 길이 있다. 우리는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고 한다. 옳지 않은 선택을 하지 말라는 경구이리라. 그러나 과연 길에도 옳고 그름이 있다면, 그 판단의 기준은 무엇일까? 역설적으로 옳지 않다는 길이 더 매력적이고 현실적이어서 시대적인 도덕적 법적 기준을 넘어서기 때문일까? 그런데도 참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길이 아닌 길을 걸어간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길은 옳고 그름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어쩌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가변적인 경우는 이러한 사람들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가지 않은 길은 길이 아닐까? 길은 지나가야 길이 되는 것이라면 사실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걸어가는 발자취의 흔적이 길이라고 한다. 설사 그 길이 옳든 그르든 그것은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한다. 소신대로 만든 길을 가고 스스로 부여한 타당성으로 각색된 삶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 생명을 갖고 있는 개체는 그렇게 자유롭다. 그러기에 각 개체가 우주의 유일한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 길은 물리적인 발길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의 생각도 마음도 길을 만든다. 생각도 자주 가던 익숙한 형태의 길을 택한다. 한 번 형성된 길은 다시 지우고 재설정한다는 것이 어렵다. 그것이 정신적인 경우라면 더욱이나 그러하다. 길을 가면 길은 발자국 따라서 하나로 보였던 세상을 좌우로 양분하고 지나가게 된다. 어쩌면 길은 이것과 저것을 갈라놓는 그 자체일 수도 있다. 길은 의도하지 않든 의도하든 목적지를 향하여 연결되어야만 하는 개체의 필연의 자국이다. 그 자국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사람의 모든 것들이 자국으로 남는다. 설령 그것이 옳든 그르든!
그러나 모두가 발자국을 남기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걸어가기는 하는데,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존재도 있다. 발자국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발자국 속에 숨어버린 것이다. 경계인은 이쪽도 저쪽도 아니기에 발자국이 없다. 다른 사람이 걸어간 발자국만 찍고 가다가, 여차하면 그 사람을 탓한다. 나름의 걸어가는 보이지 않는 비열함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세속적 해석에 따라 검은 것도 흰 것이라 하는 말도 많이들 서슴지 않고 말한다. 검은 옷을 입고 있다가도, 검은 것이 불리해지면, 잽싸게 검은 옷을 벗어 던지고 속에 감추어 입고 왔던 흰 옷자락을 날리며 태연자약하게 자신만의 발자국을 찍는다. 하기사, 얼마나 삶이 고되고 힘이 들면 그리하겠는가! 어찌되었든, 새로운 길은 그래서 대개가 용기 있는 자에 의해 새롭게 개척되고 만들어지는 것인가 보다.
시절은 모든 만물의 길들을 공간에 펼치고 있다. 가을을 걸어가는 이는 온몸으로 모든 것들의 공허한 흔들림에 기대어 시절의 이야기를 길 위에서 듣는다. 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 각자가 걸어가는 길을 뒤돌아 볼 수는 있는 것일까? 혹시 그것조차 바램으로 끝나버리고,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으면서 자신만이 믿는 그런 길을 돌아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가을에는 생각이 많아진다.
오늘은 잠시 추락한 낙엽으로, 길 위에서 길 위에 찍혀진 발자국 끝을 바라다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