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창] 김성수 충북대 교수 

늘 그랬다. 당연한 것들에 대하여 당연함 보다는 황당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는 당연한 것들 그 자체가 불편해지는 순간들이다. 기존의 틀을 깨는 것은 당연한 것들이 당연함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기존의 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편하다. 그들에게는 변화가 불편하다. 변화가 필요하냐고 묻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기존의 틀이 꼭 편한 것만이 아니라, 틀이 무너지고 새로운 틀이 형성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무너짐은 새로운 틀의 형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고층일수록 건물 맨 꼭대기에 사용된 벽돌은 지상으로 떨어지면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낮은 곳의 벽돌은 잠시 흔들리다 멈추어 설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인간이 살아가는 조직에 있어서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인간조직의 상층부는 자신들만의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는 조직에서는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는 벽돌은 찾기 힘들다. 대부분은 상층부에서 내리 눌려진 무게에 아래 벽돌만 뭉개져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어찌되었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든 기존의 틀이 깨어지고 새로운 것이 형성되고 또 다시 없어지는 과정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새로운 것이 꼭 기존의 틀보다 구성원들에게 이로운 것이라고는 말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개선이 아닌 개악의 위험이 따르더라도, 틀을 깨고 새로운 틀로 변화하는 것은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아니 되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성장도 죽음도 모두가 다 멈춘 형태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들로 이루어진 일상들 가운데 우리는 늘 존재한다. 그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자에게는 그 자체가 천벌이다. 타고난 천성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한 것들과 아주 쉽게 타협해간다. 사람들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타당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나서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피를 보는 전쟁을 치루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대부분의 우리들은 보다 더 정당한 당연함을 위하여 자신도 모르게 죽어간다.

당연한 것은 왜라는 질문을 배제한다. 당연함은 늘 그랬던 것처럼, 관행적으로 적용되었던 그 패턴을 오래된 기억 속에서 복사기로 복사해서 날짜만 바꾸어 새 종이로 새롭게(?) 내어 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그렇게 흘러가기를 원한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안주하며, 그것이 진리라 믿는다.

안주하고자하는 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안주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조직에서 힘없는 자는 힘 있는 자의 노예나 먹잇감이다. 주인은 노예를 부리고, 노예는 당연히 주인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 감히 당연한 것들에 대하여 반기를 들다니! 당연한 것들은 당연한 것이지! 감히 조상대대로 오랜 세월을 당연히 누리던 것을 빼앗아간다니! 세상에! 그들은 그러한 목적으로 억지로 껴맞춘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 왜냐면 당연함을 스스로에게 부여해야만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도 당연시 한다. 그리고 원래 당연했던 것이라 한다.

당연성의 근거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 사실, 그러고 보면, 당연하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당연성이란 부당한 것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가변적 정의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당연한 것이 아닌 것일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배반을 수없이 많이 경험하고도 아직도 당연함을 내세우는 뻔뻔함이 판치는 세상에서 당연함은 부끄럽다. 가끔은 당연한 것들에 대하여 그 당연함의 이유를 물어야 한다.

그러나 당연함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이어서 답변을 하지 않는다. 그 오만에 대하여 화를 낼 수도 없다. 다만 그 당연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생각들이 허망할 뿐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이 있을까? 어쩌면 당연한 것이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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