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금으로, 오래 훔쳐보면 본모습이 보입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시인의 '풀꽃' 가운데
공주 봉황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잡은 '풀꽃문학관'.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 가운데 하나인 '풀꽃'을 쓴 나태주 시인(78)이 집필하는 공간이다. 왜색풍 고옥(古屋), 적산가옥(敵産家屋)을 공주시에서 제의해 문학관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작은 체구, 온화한 나 시인의 미소 저편엔 사물을 꿰뚫어보는 맑은 눈빛이 있다. 그걸 나 시인은 직관(直觀)이라고 말한다.
사물이나 사물 너머 감각과 정신의 힘으로 섬뜩하게 느끼는 본질에 대한 파악, 그게 그에겐 태생적으로 자리잡았나 보다. 그리고 그 힘이 그의 시를 낳았다.
시의 오브제, 외할머니의 모성
가족사를 묻자, 외할머니 이야기가 나왔다. 그에게 외할머니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자전적 에세이 '이제는 잊어도 좋다'에서 외할머니의 추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걸 추억이라고 이름 짓는다면, 그에게 추억은 시인으로서 시를 쓰는 데 기반 재료가 되는 오브제다.
"내 인생의 원본은 나의 유년 시절 외할머니였습니다. 그 기억이 내가 시를 쓰는 바탕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 일생을 지배했죠."
외가 중심의 외할머니와 친가 중심의 아버지 사이에서 그는 늘 고민해야 했다고 한다.
외가로 도망가려고 하면 아버지는 늘 친가 쪽으로 끌어 당겼다. 당신들의 '범주' 안에 나 시인을 두고자 하는 모성(母性)과 부성(父性) 가운데 그는 늘 고민했다고 한다.
"난 인생이 서투르고 늘 낯설어요. 날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늘 진지하게 인생을 보죠. 보통의 기존 관념, 선입견으로 인생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선입견을 빼니 인생이 낯설고, 늘 새로운 날이 옵니다. 그래서 초라한 '마이너'지만 인생을 반짝이게 살 수 있게 됩니다."
시는 '본래의 그것'을 찾는 일
새로움은 아버지로 대별되는 친가와 외할머니로 천착하는 외가 사이의 낯설음이다.
유년시절의 외할머니는 그에게 모성이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줘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 분이었다.
외할머니와 살던 시절, 마을에서 공동목욕탕을 만들었다.
목욕탕이라 해야 큰 감나무 밑 공동우물 옆에 무쇠솥 걸어놓고 장작에 불 지펴 물을 끓여내던 것이 전부인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그의 몸에 덕지덕지 쌓여있는 묵을 때를 찬찬히 벗겨냈다. 그리고 말끔하게 때를 다 밀고 난 그 땟구정물에 외할머니는 당신의 몸을 씻으셨다.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유일한, 그 자체인, 규정지을 수 없는 분이 외할머니였습니다. 하면서도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 공간에 그 범주에 갇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외할머니는 내 유년을 가득 채워준 사랑이었습니다."
나 시인은 자신의 시를 통해 '본래의 그것'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본래의 그것인 외할머니는 그에게 시의 원천이자 시 그 자체다.
그의 삶에서 아버지는 대결자였고 외할머니는 보호자였다. 오라고 이끌며 호령하고 주장하는 분이 아버지였고, 네가 정한 한계대로 나아가라고 응원하신 분이 외할머니였다.
앞에 있는 아버지 보고, 외할머니는 뒤에 둔 인생을 살았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냥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냥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부친은 선생을 하라 하셨는데,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하고 싶은 것이 없음'이 존중받고 그 가치가 인정 받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꿈이 없다는 것은 오히려 진화된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어느날 서울대 교수를 하고 있는 딸이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에 아무 것도 쓰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선생님으로 썼다고. 선생님 앞이어서 '선생님'이라 답하면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을, 꿈이 없다는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나 시인 또한 초등학생 시절의 딸아이처럼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는 사람을 정면과 후면이 아닌 측면에서 본다. 45도 각도로 그 사람을 보면 숨겨진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사건이나 사물을 빗금으로 보고, 오래 훔쳐보면 그 진모습이 보인단다.
딸이 그에게 '시인 안 됐으면 관상쟁이나 점쟁이, 무당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그는 '시는 점 치는 것'과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직관이 그것이다.
그 습성은 유년시절 친가에서 외가로, 외가에서 친가로 가는 이십리길에서 비롯됐다. 소홍골뜰을 걸으며 시인은 스스로를 들여다 보곤 했다.
쉽게, 짧게, 단순하게 만나는 것
시는 '지극히 무식'하게 사물을 보던 중 자연이 그에게 준 선물이라고 말한다.
자연이 주는 그걸 받아 쓸 때 사람들이 좋아해 준다고 한다.
직관을 통해 '숨겨진 것'을 시인의 눈으로 끌어내는데, 독자들이 그걸 좋아한다고 한다.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아는 것 자체를 몰랐던 것, 그것을 발견해 내는 것이 시인의 길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래서 시는 발명이 아닌 발견이라고, 잊고 있던 '있는 것'을 찾아 내는 것, 발견해 내는 것이 시인의 일이요, 그래서 시인은 발견자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에겐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은 희망과 목표로 당위의 영역이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며 실재였다. 당위와 실재가 만나는 그 접점을 그는 회갑이 지나서야 만났다.
43년 동안 초등교사 생활이 사실이고 실재였다면, 시인으로서의 삶은 그에게 희망이요 당위였다.
"쉽게, 짧게, 단순하게 만나는 것. 내 시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찍 죽었다면, 나태주라는 이름은 없었을 테죠. 윤동주나 김소월 시인처럼 그 접점을 빨리 만난 사람을 천재라 합니다. 그걸 늦게 만난 나는 둔재입니다. 중요한 건 천재이든 둔재이든 만나게 된 그 접점을 시라는 세계로 끌어오는 것이죠."
그는 가지 말라는 길을 갔다. 가지 말라고 가지 않았다면 나태주 시인은 없었고 그는 말한다.
나이가 든 요즘 약간은 우울하다. 또래와 선배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고, 그건 바로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늘 하고 싶은 대로 살려 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내가 선생이라는 규범 안에서 살았을 때에도 여전히 꿈틀거리는 것이 있었죠. '선생 답지 못한' 무엇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 이중성이 평생의 틀이 됐습니다. 내 마음이 끌리는대로 살아왔죠. 옳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자기답게 사는 게 좋았습니다. 낯선 길에서 단독자로 산 사람, 그를 예술가로 부르지 않을까 싶어요."
아버지와 같았던 박목월 선생
그에겐 어버지와 같은 분, 박목월 선생의 시를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접했다.
선생의 초기 작 '산이 날 에워싸고'는 어린 그의 마음에 깊게 들어왔다.
선생의 시가 수록된 '청록집'을 베끼며 시를 느꼈다. 선생은 그에게 앞에 있는 산과 같았고 구름과 같았다.
고입 준비를 하던 열 여섯에 한 여학생을 만났다. 열정을 느꼈다. 좋아할수록 더해지는 열등의식.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전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감정이 문제였다.
시 쓰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래서 쓴 시가 '대숲 아래서'였다. 그것이 스물 여섯이었던 1971년 신춘문예로 등단하게 된 작품이 됐다. 그때 박목월 선생이 심사위원이었다.
선생이, 시제 '소곡풍(小曲風)'을 보시더니, '대숲 아래서'로 바꾸자 하셨다. 바꾸길 잘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는 시인이 된 것은 운명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박목월 선생을 알게 된 것이 첫째, 여학생을 만난 것이 둘째, 감정 처리에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이 셋째, 시를 통한 표현으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게 넷째.
박목월 선생과 소녀, 그리고 시는 그의 삶에서 불가분 떨어뜨릴 수 없는 '맥락'이 됐다.
박 선생과의 특별한 인연이 그에겐 세 가지 있다. 박 선생은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선해주고, 시집의 서문을 써 주고, 주례 서 주었다.
나 시인의 시를 보며 선생이 말했다.
"나군의 시는 묵은 가지에서 열리는 새로운 열매라네. 그 열매는 누구에게나 참신성을 주고 감동을 줄 것이야. 나군은 서울 올라오지 말고 시골서 글만 쓰도록."
그 말씀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지켰다.
당신의 서울 생활이란 것이 시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나 시인에게 한 당부는 당신을 본 자기 반성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시인이 시라는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라면, 내 프리즘엔 초록색이 들어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색이죠. 쉬운 시를 쓴다는 것은, 어렵고 복잡한 소재를 단순화해 쉽게 표현한다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은 일입니다. 법문 잘 하는 스님, 설교 잘 하는 목사님, 강론 잘 하는 신부님은 극락과 천국을 잘 알도록 해주는 분들이죠. 시인은 세상을 번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짧고 쉽고 단순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삶 자체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젊은이의 시간은 사건이 많아 시간이 더디게 가고, 늙은이는 사건이 유실돼버려 빨리 흘러간다고.
삶 속에서 만나는 실패와 질병과 사건은 그때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곤 하는데, 그 힘듦은 또 다시 나 시인에게 인생의 새로운 동력이 되곤 한다고 말한다.
아무렇게나 살아가려 한다
하루 일과를 물으니 "아무렇게나 산다"고 말한다. 그 다운 대답이다.
하면서도 나 시인의 일정은 늘 빼곡이 채워져 있다. 한 달 강의가 대략 20회 이상이니 노구에 배겨나기 힘들다.
올해엔 온전히는 아니지만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려 한다.
강의를 대폭 줄이고 자신의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정리하겠다고 한다. 확장 대신 축소를 택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강의를 하다보면 되레 젊은이들로부터 많이 배우게 된다고. 성인지감수성이 아닌 타인인지감수성을 배우고, 다수파가 아닌 소수파를 살피게 되고, 자기 아닌 타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려 하는 마음가짐을 배우게 된다고 한다.
"내 나이는 미래가 짧기 때문에 과거에 매달릴 수 없습니다. 나에게 어제는 역사, 오늘은 선물, 내일은 비밀입니다. 내게는 짧게 남은 비밀을 많이 풀고 가고 싶습니다."
'풀꽃'이 국민들로부터 사랑 받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한다. 짐작컨대, 모든 고민들이 '풀꽃'처럼 자기들도 생각은 했는데 그것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그걸 나태주라는 시골 시인이 대신 말해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동의, 공감, 소통의 공간이 거기엔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고. 작고, 초라하고, 낡고, 값이 싸지만 오래보면 예쁜 것,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풀꽃'이 사랑받는 것 아닌가 싶다고.
그는 시인이 됐고,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으며 공주 사람이 됐다. 그것은 그가 이루고자 했던 세 가지 꿈이었다.
"내 삶에 운이 참 좋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꿈은 스스로 잘 정리하고 내 삶의 무대에서 부드럽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글=김명기편집인·사진=이나라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