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칼럼] 오병익 전 충청북도단재교육연수원장·아동문학가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해요 / 고맙다 우리 강아지 / 근데 사랑이 뭐야 / 좋아하는 거 / 사랑하는 이유는? / 몰라요 그냥 / 말해 봐 / 쩜 쩜 쩜 / 그렇구나… /
열 살짜리 외 손주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던 두 살 터울 형이 동생을 끌어내더니 할배 심기를 추정하며 다그쳤다. 오히려 할아버지 질문이 엉터리였다는 남세스러움으로 손주들 무릎에 앉혀놓고 무제한 동영상(고질라)을 틀어 냉기를 해빙하느라 오두방정을 떨었다.
‘두벌 자식이 훨씬 귀엽다’더니, 정작 내 새끼 키울 땐 그 맛을 몰랐는데 이말 저말 버무리다보면 금세 숨이 넘어가도록 킥킥대기도 하고 덜컥 ‘할아버지 미워…’다. 기실 숨 막힐 것 같은 사랑의 회오리를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뭔가가 있다. 다들 ‘부모 노릇, 자식 노릇’하기 벅차 보인다.
◇효의 사망?
사회적 거리가 부분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세 손주 몸무게 평균 7kg 쯤 늘어난 사이 천수바라기 논둑 아래 억척스런 돌미나리가 빼곡하게 깔렸다. 마치 필자의 어릴 적, 위로 누나 둘을 뺀 아들 여섯이 잠자리에 들 때면 큰 형부터 0~5cm 간격으로 다닥다닥 붙은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자다 말고 장난기라도 발동해 간지럼을 태우거나 밤 이슥하도록 달걀귀신 얘기를 꺼낸 날 새벽녘엔 군불까지 지펴, 등 뜨신 토속적 아침을 열어주던 그리움이 아리하다.
뉘 시킨 것도 아닌데 ‘큰형’은 왕왕 형제를 쭐깃하게 만들었다. 갈수록 여기저기서 구멍 뚫린 ‘가족 분쟁’으로 시끄럽다. 실제로 우리나라 독거노인 74만 명 중 12만 명 정도는 무시와 차별, 심지어 지근거리의 왕래조차 없어 고립된 삶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 독거노인 생활실태 조사) 우애와 효는커녕 독박 쓸까 봐 아예 손주까지 상속 포기해 버리는 상황은 이미 오래 전 임계점을 넘어 섰다.
기성세대 권위가 과부하에 걸렸다는 걸 웅변한다. 하기야 가족끼리는 지지고 볶아 시끄러워야지 너무 조용하면 문제가 있다는 진단이다. 딱히 누구 잘못으로 꼬집어 말하기 싫다. ‘효의 명시적 조항’엔 정작 더 중요한 게 가려졌다. 가족의 학대에 고통 받는 노인도 심각한 사회문제다. 효를 곧 액수로 환산하니 부모도 헛갈린다. 인성을 형식적 법체계로 회복할 순 없다. 그나마 효도관광 간답시고 유기당하지 않으려면 대거리할 생각은 말란다.
◇고만고만한 행복
19세기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 3대 걸작 중 ‘안나카레니나’의 첫 문장엔 “행복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나름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썼다. 아이는 존재만으로 부모 가슴을 벅차게 만든다. 그런데 점수와 석차가 나뉘는 경쟁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면서 뒤틀린다. 풀꽃도 개화 시기와 향기까지 다른데 무조건 족친다고 능사는 아니다. 성적·친구관계 등 고단하고 힘들 때 터놓고 타박할 사람, 바로 부모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했다. 사람을 품어 안으려 않고 밀어내는 나쁜 대물림이 얼마나 무서운 제 발등 찍기인지 호되게 당하고 있잖은가. 고슬고슬한 어머니의 고봉밥과 달챙이 숟가락에 붙어 오른 누룽지, 우린 그걸 잊은 채 너무 외진 길로만 헤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