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끝이 무엇을 만지면 마음은 그것을 알아본다. 몸이 느끼면 마음은 나름대로 알아차린다. 그리고 사람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면 쾌적할 수 있지만 즐거울 수는 없다. 즐거움이란 생각하는 마음이 누릴 수 있는 까닭이다. 락(樂)이란 무엇인가? 즐거움이 아닌가! 사랑함을 생각하는 순간에서 그것은 시작된다. 이처럼 즐거움은 마음속에 어린다. 왜냐하면 즐겁다는 것은 마음속 모습을 말하기 때문이다. 모습이 순수하면 즐겁고 사랑으로 그득하면 즐겁고 사랑함이 있으면 미워함도 있게 되는데 사랑함이 미워함을 이겨내야 즐거운 것이다. 즐거움은 마음속의 적을 물리치고 사랑을 이루게 한다. 그래서 즐거움은 마음 갖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어떻게 마음을 갖출까? 지나치지 마라. 알맞게 하라. 예(禮)도 지나치면 무례(無禮)인 것처럼 즐거움도 지나치면 방탕일 뿐이다. 그래서 알맞음을 항상 앞자리에 세워야한다. 경기장에 가면 흥분할 수는 있어도 즐거울 수는 없다. 흥분하지 마라. 흥분은 마음속을 미치게 하는 까닭이다. 디스코텍에 가면 쾌락을 누릴 수는 있어도 즐거울 수는 없다. 쾌락은 마음속을 썩게하는 까닭이다. 즐거움을 송두리째로 잃어버린 사람은 누구일까? 아편쟁이 같은 사람이 그런 치에 속한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탐닉하면 즐거움은 상처를 입는다. 지나친 애정이 증오의 옆집에 있다는 말이 생겼다. 그래서 즐거워하되 음탕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현대인은 욕망이 지나쳐 탈이다. 왜 현대인은 사납고 암울한가? 욕망의 노예로 시달리고 있는 까닭이다. 욕망이 지나치면 마음이 비개덩이처럼 되어 느끼할 뿐 담백한 줄을 모른다. 걸핏하면 성내고 신경질을 부리는 현대인은 즐거움을 잃어버린 증세인 것이다. 힘만 믿고 설치는 사람은 사나울 수밖에 없다. 즐거움은 사람들을 하나이게 한다. 다정히 손을 잡고 가는 연인은 즐거움을 갖게 하고 서로 반가워 손을 잡는 벗 또한 즐거움을 갖게 한다. 유치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즐거움을 만나고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의 어깨에서도 즐거움을 마주한다. 즐거움이란 삶을 슬기롭게 하는 빛살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쁨이 슬기로움으로 통하면 그 기쁨이 즐거움이 되고 고통도 지혜로 통하면 즐거움이 되는 셈이다.
즐거움은 사람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그 안은 어디인가? 마음속이다. 마음속에는 무수한 감정도 있고 무수한 생각도 있게 마련이다. 그것들이 무슨 탓으로 얽혀 혼란스러운 것보다는 밝고 맑게 평온하기를 즐거움은 바란다. 이는 마음속이 서로 하나가 되어 평화스럽다는 것을 말한다.
어느 때 누가 이러한 마음의 평화로움을 바라지 않을 것인가? 아무도 없다. 이처럼 우리가 잊어서도 안 되고 잃어서도 안 되는 삶의 즐거움을 너무도 등한시 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즐거움을 버린 채 마음을 조이며 사는가? 이는 우리가 어진 마음을 버리고 사는 까닭이다. 어진 마음 그것은 곧 사랑함이 아닌가! 건강과 행복은 즐거움에서 오는 것 하루하루를 나와 남을 사랑하고 어질고 온화한 마음으로 산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즐거울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