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느 길을 가든 서울만 가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러나 목적이나 목표가 있으면 무슨 수단이든 모조리 동원해서 그것들을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사람을 무서운 사냥꾼으로 몰아 버린다.
한 때 하면 된다는 구호가 판을 친 적이 있었다. 일부터 벌여 놓고 해가면서 그때 그때 메방을 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을 해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을 끓이는 일과 밥을 짓는 일은 다른 법이다. 쌀죽을 끓이자면 물이 많아야 하고 쌀밥을 짓자면 물이 적어야 한다. 이처럼 하는 일에는 저마다 다른 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는 일마다 그 동기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처음부터 밥을 짓는 동기가 밥을 짓는 일로 이어져야 하는 법이다. 밥이 잘 지어졌으면 그만큼 정성을 들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소홀히 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결과만 놓고 성패를 따진다면 변명이 무성하게 되고 무성한 변명은 속임수를 쓰는 경우를 낳는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 거둔 곡식과 훔친 돈으로 사들인 곡식은 서로 다른 곡식이다. 어떻게 해서 마련된 곡식인가를 따지면 왜 다른가를 알 수가 있는 일이다. 이처럼 하는 일에 마음이 어떻게 쓰였는가를 따질 줄을 안다면 결과만 놓고 성패를 따지진 않을 것이다. 동기를 살피는 일은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튼실하게 한다.

사향노루는 사향을 몸에 지녀서 사냥꾼의 표적이 되고 곰은 웅담을 지녀서 덫에 목을 메이게 된다. 사향은 비싼 값으로 팔리기 때문에 사향노루 사냥꾼들은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높은 산정에다 소금을 뿌려 놓고 사향노루를 한 없이 기다린다. 사향노루가 소금기를 좋아하고 삽초라는 풀잎을 좋아함을 아는 사냥꾼은 삽초가 많이 자라고 멀리서 해풍이 불어오는 곳을 찾아가 사향노루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지리산에는 사향노루가 살기에 알맞은 곳이다. 지리산 남쪽 자락은 남해를 바라보고 있어서 무시로 바람에 소금기가 실려 오고 삽초들이 많이 자라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지리산 천왕봉 부근에서 바람을 맞는 사향노루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명포수의 일화도 심심찮게 많다. 삽초가 자라는 비탈에 소금을 뿌려놓고 몇 달을 기다리던 포수의 눈앞에 마침내 사향노루가 나타나 짭짤한 삽초 풀잎을 따먹으면서 빼어난 용모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얼마의 삽초 잎으로 배를 채운 사향노루가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남쪽을 바라보면서 홀연히 앉아 산 아래를 굽어 본 순간 그 포수는 불질을 하려고 겨누었던 총을 내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만히 숨어 아름다운 사향노루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황홀해진 그 포수는 사향노루를 사냥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을 처음으로 만났다는 것이다. 의젓한 사향노루의 자태에 감동이 된 포수는 사향노루를 잡아 사향을 떼어서 돈벌이를 해야 한다던 욕심이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애틋한 마음을 얻었던 셈이다. 만일 그 포수에게 하면 된다는 생각만 앞섰더라면 사향노루는 영락없이 잡혔을 것이고 그 포수는 돈을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냥총을 거둔 포수의 마음은 활쏘기에서 과녁을 맞추는 것만 노리지 않는다고 한 활궁의 말을 새겨듣게 된다. 양궁이 올림픽 경기종목이 된 뒤에는 선수들이 기량을 경쟁할 때 적중률을 가지고 금메달을 결정한다. 그래서 선수들은 과녁에 화살을 적중시키려고 마음을 가라앉치고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금메달의 결과만 놓고 흥분을 하지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가 그 이전에 치른 마음의 훈련은 모른다. 더구나 선수가 금메달에 대한 욕심으로만 가득차서 활을 쏘면 정작 금메달을 놓치고 만다는 것을 세상은 모른다.

그러나 금메달을 목에건 선수는 그런 욕심을 버리고 살질을 해야 하는 것을 안다. 화살이 적중하는 것은 결과일 뿐이고 그렇게 해준 무수한 동기가 있었다는 것을 선수는 안다. 어떤 일의 결과보다 그 동기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행위에 이르고 올바른 마음이 올바른 행위로 이어진다는 생각을 지니게 한다.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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