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성규 예올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가장 큰 명절인 한가위가 지났다. 오곡백과가 풍성하고 농사가 마무리되는 시기라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조상을 기리며 가족 친지 간 우의를 다지기 가장 좋을 때이다. 하지만 명절이 축복받고 흥겨운 자리가 아니라 갈등이 조장되고 가정불화의 원인이 되어 명절증후군이란 신조어가 생긴 지 오래다. 명절이라는 본질이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조율이시 홍동백서 좌포우혜 등 격식에 맞추어 제사상이나 차례상을 진설하고 엄숙히 제례나 차례를 올리는 것은 우리의 풍속이 아니라 한족의 것이다. 조선이 성리학을 국기로 삼으면서 주희의 ‘가례’를 보급하고자 노력하여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야 널리 퍼졌고 어느덧 우리의 전통문화로 오인되었다. 유구한 오천 년 역사에서 이삼백 년 유행한 풍속을 어찌 전통이라 할 수 있는가? 특히 우리의 정체성을 왜곡하는 풍속이기에 해악이 더욱 크다. 전통계승을 표방하는 식자층조차 오해가 깊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윤내현의 ‘고조선연구’에 따르면, 한족의 청동기 유적에서는 무기를 제외하면 주로 음식 그릇, 술통, 술잔 등 제기가 다량 발견되었고 우리의 청동기 유적에서는 주로 청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 놀이와 연관된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한족은 술과 음식을 진설하여 천지신명께 환심을 사거나 자신의 위신을 과시하려 했던 반면 우리는 음주가무를 통해 천지신명과 혼연일체가 되어 이웃들과 신명나게 어울리면서 화합을 도모했다.

동아시아의 중심인 중국과 이웃하면서도 우리는 독자적인 문화와 국체를 유지하면서 존속했다. 활발한 교류에도 불구하고 한족과 현저히 다른 문화적 특색을 보존했다. 위에서 언급한 제사 외에도 의식주 고루 한족과 크게 차별된다.

한족은 장자상속을 근간으로 한 반면 우리는 남녀 구분 없이 균등상속하였다. 조선 중기까지도 이러한 전통이 유지되어 가난했던 이황 선생은 부인의 유산으로 도산서원을 설계 건축할 수 있었다. 고려나 조선 초기 권문세가에 장가든 이들 중 부인의 유산으로 집성촌을 이룬 이들도 많다. 한족은 일부다처제를 선호했지만 우리는 일부일처제를 고집하였다. 권세나 재력이 있는 한족은 의례 여러 처첩을 거느렸는데 우리는 고관대작이라도 허용되지 않았다. 송의 사신 서긍의 고려 기행서인 『고려도경』에도 이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한족은 부인이 시집살이하였고 우리는 남편이 처가살이하였다. 장가가면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처가에 머물다 부모가 노쇠하여 생활이 어려우면 본가에 들어가 봉양하였다. 현모양처의 대명사인 신사임당도 시집살이한 적이 없으며 말년에 잠시 연로한 시부모를 모셨을 뿐이다. 조선 말기에도 풍족한 집안에서는 딸을 시집보내지 아니하고 사위를 처가살이시켰다. 고부갈등은 시집살이하던 한족의 일이었고 우리는 주로 장모와 사위 사이에 장서갈등이 있었다.

한족 문화는 제사 문화, 장자상속, 일부다처제, 시집살이 등으로 대변되고 우리 문화는 신명 문화, 균등상속, 일부일처제, 처가살이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근래에 이르러 조선 후기 잠시 경도되었던 한족의 풍속은 사라지고 전통문화가 복원되고 있다. 장자우대상속은 1990년에 이르러 균등상속으로 바뀌었다. 성매매보다 축첩에 관대한 현실은 납득 되지 않으나 일부일처제는 법으로 정한 바이다. 핵가족 사회로 변모하면서 시집살이도 대부분 사라졌다. 처가살이하거나 처가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데 이는 아이 성장에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전통으로의 회귀 속에서 제사 문화는 장자상속, 남존여비 사상이 집약된 한족 문화의 결정체인데 아직도 이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명절이나 기일은 가족이나 친지가 모여 조상을 기리고 서로 간에 정을 돈독히 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본래 남녀 구분 없이 돌아가면서 잔치를 준비하여 형제간에 우애를 다졌으며 이를 위해 형제계를 한 사례도 발견된다. 이제부터라도 제사상이나 차례상 대신 잔칫상을 준비하여 신명나게 어울리는 화합의 장을 만들어보자. 장례를 성대히 치르고 제사나 차례를 올리는 것은 자신의 위신만 과시하는 허례허식이다. 살아계실 때 마음을 살피고 형제간에 의좋게 지내는 것이 진정한 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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