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의 시대 꽃피운 꿈과 희망… 한국 드라마계에 '새 지평'
1974년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국민작가 반열
'국책 드라마' 평가 속 '국민 드라마'로 흥행 성공
호방한 성품… '몽각산방'엔 사람들 발길 줄이어

 

1974년 윤혁민 작가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국민 드라마'의 대접을 받은 '꽃피는 팔도강산'을 집필하게 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윤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인생 대박이 난 것이었고, 한국 드라마 작가로 새 지평을 연 것이었다.

지금도 윤 작가의 집 '몽각산방(夢覺山房)' 벽에는 30여 년 전 한국일보에 게재됐던 '꽃피는 팔도강산' 홍보 포스터가 걸려 있다. 전면 컬러로, '鎔鑛爐처럼 뜨겁고 굳센 繁榮에의 意志와 執念'이라는 홍보 문구가 눈에 띈다.
 

공전의 히트작 '꽃피는 팔도강산'

윤 작가가 집필한 '꽃피는 팔도강산'은 KBS TV에 무려 1년 6개월 동안 방송됐다.

그때 사람들은 저녁상만 물리면 그 드라마를 보며 하루의 고단함을 잊곤 했다. 
 
그 당시 텔레비전은 면 단위에 한 대가 있을까말까 한, 귀하디 귀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꽃피는 팔도강산'을 보려고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꾸역꾸역 모여들곤 했다.
 
그 시절은 조국 근대화라는 기치 아래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던 때였고, 그래서 그 상징성을 지니고 있던 포항제철을 매개로 한 이 드라마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애착은 매우 강했다. 
 
드라마 사상 초유의 기록을 여럿 가지고 있는 이 드라마가 성공가도를 달린 데에는 극작가와 연출가, 출연진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박 대통령의 영향 또한 컸던 것이다.
 
1974년 4월 14일부터 다음해 10월 5일까지 밤 9시 40분부터 10시까지 1년 6개월에 걸쳐 398회가 방송되면서, 이 드라마는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과 꿈을 심어주었고, 자긍심을 갖게 해줬다. 연출은 김수동 선생이 맡았다.
 
윤 작가는 그 당시를 회상한다.
 
"ENG카메라가 등장하기 전이라 대부분을 야외 녹화로 진행해야 했고, 그 바쁜 일류 배우들을 묶어 놓으면서까지 전국을 누볐지요. 꽃피는 팔도강산은 장비나 인력, 제작비 등 그때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KBS의 전폭적인 지원과 연출 김수동 선생을 비롯해 제작진과 출연자들의 헌신적인 노력, 국민들의 절대적인 관심, 관련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당시로서는 최장수 연속 드라마가 될 수 있었습니다."
 

김희갑·황정순 등 초호화 캐스팅

KBS 전속작가이던 그는 1960년대 말부터 프리랜서를 선언했다. 그리고 '즐거운 우리 집', '김삿갓 북한방랑기' 등 여러 작품을 썼다.
 
그의 역작 '꽃피는 팔도강산'은 전국을 누비고, 때로는 해외 출장을 통한 현장취재를 통해 드라마 대본을 썼다.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잠시도 쉴 여가가 없었다. 
 
연출을 맡은 김수동 선생이 영화제작을 하다가 KBS에 온 지 얼마 안 된 시기였고, 그는 모든 역량을 이 프로그램에 쏟았다. 
 
영화계, 연극계, TV 탤런트 등 일류 연기자로 구성된 출연진들도 이 프로그램에 모든 힘을 기울였다. 그 당시 내로라하는 연기자들이 이 드라마에 대거 등장했는데, 그 면면이 매우 화려하다.
 
김희갑·황정순 노부부와 큰 딸 내외 최은희·장민호, 둘째 딸 내외 도금봉·박노식, 셋째 딸 내외 김용림·황해, 넷째 딸 내외 태현실·박근형, 다섯째 딸 내외 윤소정·문오장, 여섯째 딸 내외 전양자·오지명, 일곱째 딸 한혜숙과 민지환 등 그야말로 초호화 캐스팅이었다.
 
'꽃피는 팔도강산'의 스토리 라인은 대략 이렇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무렵, 서울에 살고 있는 딸부자 김희갑, 황정순 노부부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식들을 만나기 위해 전국 일주를 하게 되고, 자식들을 차례로 만나면서 겪게 되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와 함께 한국 전쟁의 비극을 딛고 가는 곳마다 눈부시게 발전한 대한민국의 발전상과 명승고적 등 관광지와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전국의 산업현장을 소개하는 형식이다.
 
1967년 국립영화 제작소가 제작한 계몽 영화인 '팔도강산'이 흥행에 성공하자 1974년 KBS 텔레비전에서 일일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다시 제작됐던 것이다. 

▲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박정희 대통령(맨 오른쪽)으로 부터 표창장을 받고 있는 윤혁민 작가(맨 왼쪽).
▲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박정희 대통령(맨 오른쪽)으로 부터 표창장을 받고 있는 윤혁민 작가(맨 왼쪽).

 

"팔도강산 작가가 아니라, 잡가올시다"

박정희 정권 시대인 1970년대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은 이에 대한 시각의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확연히 갈라진다.
 
혹자는 빈민국이었던 한국의 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거둔 때라고 평하고, 혹자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희생양으로 삼은 경제성장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한다.
 
'먹고 살기 좋아진' 점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지만, 그 명분 아래 횡행했던 독재의 그림자가 가혹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비판적인 목소리들이 커져가기 시작했다. 
 
정부의 정당성을 위해서라도 경제 발전의 성과를 홍보해나가는 '정책 홍보성 드라마'가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꽃피는 팔도강산'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에 쏙 들었을 것이었다.
 
평자들은 '꽃피는 팔도강산'을 두고 '새마을 드라마'로 분류하곤 하는데, 여타의 새마을 드라마가 개발과 근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면 이 드라마는 주로 경제 성장의 성과와 과실을 보여주는 데 치중했다.
 
작품은 큰 성공을 거뒀지만, 드라마 극본을 공필한 윤 작가는 "당혹감을 안겨주는 작품의 하나"라고 말한다.
 
"다행이 많은 사람들이 봐줬기 때문에 아직도 어떤 자리에서 누가 나를 초면의 사람에게 소개를 할 때는 그 작품을 들먹이는 경우가 많고 중년 이상들은 거의 다 그 작품을 기억해주기 때문에 굳이 '족보'를 대줄 필요가 생략되는 이점은 있어요. 그런데 그 반응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예요. '아······.' 감탄사 한마디로 그냥 재미있게 봐줬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위 먹물깨나 들은 사람들 중엔 '아, 그거요? 박통이 우리나라 발전상을 홍보하기 위해서 만든 홍보 드라마였죠?' 하는 식이죠. 그 표정의 근저엔 '짜식, 뭔가 했더니 어용작가였구만' 하는 비아냥이 배어 있게 마련이었죠. 그럴 때마다 나도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 〈팔도강산〉 작가가 아니라 잡가올시다.'"
 

'최초 기록' 써내려간 국민의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은 1974년 봄부터 이듬해 가을까지 1년 반 동안 방송되면서 드라마 촬영에 최초로 녹화차가 도입됐다. 
 
또 대한항공의 파리 취항을 계기로 1975년에는 유럽 현지 녹화도 이뤄져 최초의 해외 로케를 했던 드라마이기도 하다.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포항제철의 지원으로 한국일보에 전면 컬러 광고를 냈던 것도 드라마로서는 최초의 일이기도 했다.
 
김희갑, 황정순, 최은희, 황해, 박노식, 한혜숙 등 당시 톱 탤런트들이 총 출동해 시청률이 40%에 달했고, 398회 방송으로 당시로서는 최장수 드라마로 인기를 누렸다. 
 
정부 홍보 드라마였음에도 국민 드라마가 되었던 이유는 속초에서부터 포항, 울산 등 전국을 누비며 달라져가는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그려 드라마의 구성이나 내용이 시대적인 상황과도 잘 맞았고,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과 부모를 서로 모시려고 하는 자식들의 효심이 만들어낸 가족애, 그리고 가난한 시절 힘겨운 상황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을 훈훈한 이야기로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 교장선생님이던 부친이 돌아가시기 1년 전인 1969년 종손 경섭에게 고향 땅을 가르쳐 주고 있다.
▲ 교장선생님이던 부친이 돌아가시기 1년 전인 1969년 종손 경섭에게 고향 땅을 가르쳐 주고 있다.

 

부친 사망사고와 장자 의식

윤 작가는 가난한 교장의 10남매 중 장남이었다. 식구가 열 두명이었다.
 
그 대가족이 먹고 살려면 한 달에 쌀 한가마 반은 있어야 했다.
 
잠자리는 더욱 심각해서, 온 식구가 누워 잘만한 방이 없어 마루에 3층으로 침대를 만들어 동생들이 잘 수 있도록 했다.그러던 중 윤 작가 가족에 큰 비극이 닥쳤다.
 
부친이 지방 출장 중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변을 당한 것이었다.학교 교장 신분이었으니 출장비에 여관비가 책정돼 있었지만, 부친은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는 마음에 허름하고 값싼 여인숙에 투숙했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이젠 이 많은 내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장자의식(長子意識)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했다.

"그때 저는 동아방송국 라디오 일일드라마 '수녀 아가다'를 집필하고 있었어요. KBS에서 시작된 라디오 일일드라마는 본래 한 달을 기준으로 30회였는데, 동아 방송국에선 그 전례를 깨고 60회 드라마를 기획했죠. 그 첫 번째 작가로 제가 발탁됐는데, 그야말로 눈코뜰새없이 바쁜 시기였죠. 그날도 드라마 집필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밤 10시쯤 전보가 왔어요. '윤태원 사망 부산 초량 파출소장.'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죠. 전화도 없어 이리저리 알아보니 사실이었어요. 그래도 내일 당장 방송은 나가야 되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책상 위에 촛불을 켜 놓고 한 장 쓰고, 울고, 두 장 쓰고 울고. 다음날 첫 비행기로 부산엘 내려가 사고가 난 여인숙을 찾아 아버님을 뵈었죠."
 
그건 사고사였다. 여인숙 주인은 연탄을 절대 피우지 않았다고 잡아뗐지만, 연탄 아궁이를 보니 따뜻했다. 그는 진상을 올바로 규명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결국 60회로 예정됐던 '수녀 아가다'는 30여회 끝에 도중하차 하게 됐다.그러나 국과수에선 '연탄가스 사망이 아님'으로 결론을 냈다. 
 
여인숙 주인의 동서되는 이가 국회의원이라는 말도 들렸다. 나중에 여인숙 주인은 연탄 피운 사실을 시인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당시 법령으론 재직 30년 이상이 돼야 연급이 나왔고, 공무 중 사망에 대한 특별대우도 없었어요. 부친께서 국가 유공자로 대우를 받게 된 것은 돌아가신 지 23년이 지나서였지요."
 

지극한 부모님 사랑

윤 작가가 가지고 있는 부모님에 대한 효심은 매우 깊다.
 
그가 이 곳 천안시 동면 행암리로 20여 년 전 거처를 옮긴 까닭은, 작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니 그보다는 어머니의 소원, '귀향'을 들어주지 못한 장자로서의 회한이 섞인 것이었다.
 
사람의 '한 살이'란 것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지만, 그리고 그것이 세상의 자연스런 이치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가지고 있는 부모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또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자신 또한 인생의 황혼에서 고즈넉한 여생을 흘려보내고 있지만,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마음이 생기고, 또 그 생긴 마음을 지우고 하는 덧없는 '도돌이표'이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서도 부모님을 떠올리면 울컥하곤 한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해는 1994년 7월 20일이었어요. 향년 76세였죠. 중풍으로 휠체어 신세셨던 어극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하셨어요. 그때 전 사업이 도산해 집 한 칸 마련할 여력이 없었던 때였죠. '올해만 기다려 주세요, 내년에는 꼭'이라는 말을 3년이나 하면서 불효를 저질렀는데, 끝내 고향에 터를 잡아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죠. 그토록 원하시던 바를 이뤄드리지 못하고, 관 머리를 앞세우고 돌아왔으니 그 불효를 어찌 하겠습니까."
 
윤 작가는 그때의 일이 한이 돼 집안 조카가 살던 집을 빌어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다 아예 터를 잡고 살게 됐다.
 

사람들 발길 잦은 '몽각산방'

윤 작가의 '몽각산방'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몽각산방'을 찾아 자연의 정취를 느끼며 한갓진 시간을 갖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워낙 그가 호방하고 대범한 성품이어서 사람들을 맞는 품 또한 매우 넓고 깊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그의 넓은 '품'은 12가족의 장남으로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삶의 지혜가 아닌가 싶다.
 

몽각산방(夢覺山房)은 무슨 뜻일까?

"오는 손님들마다 그 뜻이 뭐냐고 물어봐요. 그렇게 지은 나도 몰라요. 꿈속에서 깨달으라는 말인지, 꿈 깨면 깨달으란 말인지. 그냥 느끼는 사람 마음인 거죠."
 
공자는 논어 이인편에서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 했다. '아침에 도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는 말이다.
 
그 깨달음에 도달하는 길은 너무나도 요원한 것이겠지만, 이 가을날 우리는 몽각산방에 묻혀 그 깨달음을 꿈속에서라도 이룰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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