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삶의 악(惡)을 줄이고 삶의 선(善)을 넓혀 왔는가? 이러한 물음에 그렇다고 잘라 대답할 처지가 못 되고 있다. 점점 법의 종류는 많아지고 형무소의 담은 높아만 간다. 활이나 창으로 말을 타고 싸우다가 총과 대포로 차를 타고 싸웠고 이제는 미사일과 컴퓨터로 비행기를 타고 전쟁을 한다. 참으로 전쟁은 한없이 발달해 왔다. 한없이 멀었던 세상도 이제는 아주 가까워져 사람들의 왕래가 멀고 가까움이 없어져 버렸다. 이처럼 온통 세상은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계는 조용할 날이 없다. 배부른 나라가 있는가하면 배고파 굶어죽는 나라도 있고 힘을 믿고 힘없는 나라를 유린하는 작태는 더더욱 교묘해지고 잔인해져 가기만 한다. 사람과 삶을 사랑하는 쪽보다는 미워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모양을 버리지 못한다. 나와 너가 그렇고 가정이 그렇고 사회가 그렇고 나라도 그렇고 세상이 다 점점 조급해지고 삭막해지고 막막한 쪽으로만 차츰차츰 기울어져 가는 꼴이다.
왜 인간의 세상은 이렇게만 돌아가야 하는가? 나는 참으로 남을 사랑할 줄 아는가? 이러한 물음에 부딪쳐 보기도 한다. 남을 사랑하는데 인색하면서 남으로부터 지나친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가장 잔인하다. 나에게 유리하면 선(善)이 되고 불리하면 악(惡)이 된다고 속셈을 치는 사람들이 가장 잔혹하다. 제 몸을 치장하는데 수 백 만원을 뿌리지만 남을 위해선 한 푼도 쓰지 않는 사람에게 자선하라고 하면 누굴 위해 하느냐고 반문한다.
사랑할 줄을 모르면 인색한 법이다. 목숨을 사랑하면 목숨에 인색하여 생명을 아낄 줄 알고 돈을 사랑할 줄 알면 금전에 인색하여 돈만 아낀다. 그래서 돈 벌이가 된다면 무슨 짓이든 하게 된다. 살인도 하고 사기도 치고 약탈도 한다. 이러한 짓들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증명이다. 왜 인간은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부귀를 향하는 욕망이 지나쳐 그렇게 된다.
사람이 부귀를 바라는 것은 버릴 수 없는 욕망이다. 허나 부정한 방법으로 남의 등을 쳐서 부귀를 누린다면 남의 부귀를 빼앗는 꼴이 된다. 한탕을 해서 한 몫을 잡아 내가 배부르게 살면 그 한탕에 당한 다른 사람은 배고프게 살게 된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분명 세상은 부드러워지고 순해지고 섬세해질 것이 아닌가! 세상이 거칠다는 것은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고 세상이 잔인하다는 것은 사람이 또한 잔인하다는 것이 아닌가. 누가 잔인하고 거칠단 말인가? 바로 남이 아니라 내 자신임을 확인해야 한다.
꼬마의 작은 손에 백 원짜리 동전이 쥐어지면 보기가 좋으나 만 원짜리 지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처럼 욕심에도 분수가 있는 법이다. 현인이라고 해서 욕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욕심의 내용이 다를 뿐이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값을 따질 수도 없는 사랑을 올바르게 탐한다. 너그럽게 남을 사랑할 줄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있다는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