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마침내 입춘이 지났다.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은 봄이 성큼 발치까지 들어선 것이다.

어느 해보다 유독 추웠던 겨울이다. 기온으로만 치자면 근래 영하 20도를 넘나들던 겨울도 있었으니 최고로 추웠던 해는 아니다. 다만 겨우 1.5센티의 첫눈이 내렸던 날에 겪은 일이 유독 ‘추웠다’로 굳혀졌으니 고통은 크기대로 무의식에 각인된다는 말은 맞다.

그날은 새벽에 눈이 올 거라는 예보를 알고도 전혀 제설작업을 하지 않은 거리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한 채, 방황했던 날이다. 이리저리 미끄러지는 차의 핸들을 으스러질 정도로 꼭 붙잡고 어찌할 바를 몰랐던 기억은 떠올리기도 싫다. 그런데도 출근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다시피 했으니 생각할수록 악몽 같은 날이다.

아파트에 살면 한겨울에도 반 팔을 입고 지낸다는 다소 과장된 말은 언감생심이다. 아무리 난방이 잘 된 집이라도 겨울답게 옷을 입어야 정당하다고 생각하기에 덥게 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옷을 껴입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옷 하나를 더 입고 있다.

가스비 폭탄을 맞은 대다수 서민은 다음 달 고지서에 또 안절부절하고 있다. 그래봐야 평소보다 실내온도를 더 낮추거나 콘센트마다 꽂힌 플러그를 빼 미세하게 흐른다는 대기 전류 따위를 줄이는 일 뿐이다.

낮추고 낮추어 요금 부담이 줄어든다면 무엇이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할 지경이 된 것이다. 궁상도 이런 궁상이 없다. 단칸방 아궁이의 연탄불을 갈며 긴 겨울을 나야 했을 때, 치를 떨며 봄을 기다렸던 그 심정 그대로가 아니던가.

그러나 아기가 있는 집은 그럴 수도 없다. 행여 추위로 병이 날세라 눈을 질끈 감고 온도를 높여야 한다. 출산가정에 전기세 할인을 비롯해 영아 수당에서 이름을 바꾼 부모 급여 수당 등의 각종 혜택을 준다고는 하나 나날이 출산율이 떨어질 정도로 아이 낳아 키우기가 여의치가 않은 세상이다.

오늘도 난방을 끈 채 무릎담요와 조끼를 걸치고 등으로 온전히 햇빛을 받으며 아기 영상을 봤다. 우는 모습, 웃는 모습, 하품하는 모습, 어느 모습 하나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충만한 따듯함이다.

영상을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겨우 빛을 따라 고개를 돌리는 아기부터, 바닥을 기거나 아장아장 걷는 아이까지 아이들은 격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게 하는 오묘한 힘을 가졌다. 비록 영상 속에서 만나는 남의 아기일지라도 몹시 예쁘다.

보살핌을 뜻하는 돌봄(care)의 어원은 슬퍼하다, 애통하다, 고난에 동참하다, 고통을 나누다, 에서 시작한다. 고대 게르만어인 ‘카라(Chara)’ 즉 ‘마음의 부담’이란 말에서 파생된 말로 돌봄이란 어원처럼 매우 어렵다. 특히 아기 돌봄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 절대로 이론처럼 되지 않으며 어느 육아서도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게 해답을 주지 못한다.

우리의 삶에 돌봄 문화가 자연스럽게 스몄다. 그러나 입학 철을 앞두고 초등학생의 돌봄교실에는 이상 신호가 왔다. 특히 수도권 학교가 심각하다는데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해 무려 5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추첨이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부모들은 학원 뺑뺑이 돌리기 등으로 과다한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니 일하는 엄마는 애가 탄다.

대출 금리가 오르고 각종 공과금,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참으로 척박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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