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정보국이 한국 정부를 도청했다는 내용이 담긴 기밀문건이 유출돼 큰 파장을 낳고 있다. 이 문건에는 중국 등 적성국가는 물론, 한국 이외에 프랑스, 이스라엘 등 여러 우방국이 포함됐다.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은 우크라이나 전황 등을 분석한 미 정부 기밀문건이 온라인에 유출됐다는 보도를 하고 있는데, 한국의 경우 김성한 당시 국가안보실장 등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들이 우크라이나에 155㎜ 포탄을 지원하는 방안을 고심한 대화도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충격적인 일이다. 한·미 동맹 근간인 신뢰를 흔드는 일로 일종의 배신행위다.
즉각적이고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할 대통령실은 차일피일 입장발표를 유보하더니, 11일이 돼서야 공식입장을 내놨다.
‘터무니없는 거짓 의혹임을 명백히 밝힌다’는 내용이었다.
용산 대통령실은 군사시설로, 과거 청와대보다 훨씬 강화된 도·감청 방지 시스템을 구축·운용 중에 있다며 여론으로부터 큰 질타를 받은 ‘대통령실의 보안시스템’에 문제가 없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도 유출된 ‘기밀문서’를 두고 “공개된 정보의 상당수가 위조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양국 국방부 장관이 통화했고 견해가 일치했다”며 온라인에 공개된 문건이 위조됐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양국의 ‘기밀문건 위조’라는 공통된 견해에 썩 믿음이 가지 않는다.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대통령실을 예전부터 도·감청해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1970년대 주한미군 철수, 한국 인권문제 등을 두고 한국과 미국이 다투는 와중에 1976년 10월 미국 워싱턴 포스트 보도로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가 터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박동선 등 로비스트를 통해 미국 의원과 공직자를 돈으로 매수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는데, 정보의 출처가 미국 중앙정보국이었다. 청와대를 도청해 이를 파악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미국 도청을 피하려고 중요한 이야기는 집무실에서 하지 않고 청와대 뜰을 거닐면서 했다고 전해진다.
2013년에도 미국이 주미 한국대사관을 비롯해 38개국의 재미 공관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미 국가안보국 직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이 미국이 동맹국까지 감시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했던 것이다.
미국 정보기관이 한국 국가안보실을 훤히 들여다보며 도청을 하고 있다는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한국 정부의 태도는 이를 애써 외면한다.
‘관행’처럼 도·감청을 해왔던 미국이 ‘우리가 했다’며 사실을 시인할 것이라고 믿는 국민은 거의 없다. 그래서 한미의 ‘일치된 견해’를 곧이 곧대로 믿기 힘든 것이다.
동맹은 신뢰 관계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깨지면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정부는 미국에 대한 강력한 항의와 재발 방지 약속부터 받아내야 하는데 곧 진행될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와 한미 정상회담에 목을 맨 채 눈치만 살피고 있다.
‘미국 입장’이 아닌 ‘한국 입장’을 당당하게 밝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