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백정과 어울리다보면 옷섶에 피가 묻는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사람을 잘 사귀라는 말이다. 사람은 좋은 일도 할 수 있고 몹쓸 일도 할 수 있는 묘한 동물이다. 좋은 일이 버릇이 되기도 하고 몹쓸 일도 버릇이 되기도 하는 법을 사람은 안다. 그러나 좋든 궂든 하나의 버릇에 빠져들면 나오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 되기도 한다.

소매치기의 무리에 끼이면 나의 호주머니를 터는 손재주를 제일로 치고 금고털이의 패에 들면 금고 다이얼 소리를 잘 듣는 귀 밝기를 제일로 친다. 칼잡이는 칼 쓰는 솜씨가 목숨을 보장 한다고 믿고, 권문세도는 술수가 높을수록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고 믿는다. 그러니 소매치기와 어울리면 남의 지갑을 털고 칼잡이와 어울리면 남의 가슴에 칼을 꽂는 짓을 범한다. 이처럼 사람은 사악한 짓에 자신도 모르게 물들어 버린다.

그러나 어진 사람의 곁에 있으면 어진 삶을 만난다. 옛날부터 입을 꽉 다물고 몇 시간을 함께 있어도 불안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군자라는 말이 있다. 천년을 사는 학은 암수가 가만히 서로 마주보고 있으면 수컷의 기가 암컷으로 가서 알이 된다는 말도 있다.

이는 모두 선하고 진실한 것을 가까이 하면 선하고 진실하게 됨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패를 지어 까마귀의 무리니 백로의 무리니 편을 갈라 선악을 가릴 것은 없다. 사람의 일에는 선악이 함께 하기 쉬워서 왼쪽에서 보면 악(惡)일 수 있는 것이 오른쪽에서 보면 선(善)이 된다고 주장하는 입질들이 무성하게 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어진 사람은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는다. 본래 어짐 이란 선(善)을 사랑하여 더 큰 선이 되게 하고 악(惡)이 악임을 일깨워서 선(善)으로 이끌어 주는 덕(德)의 모습인 까닭이다. 그래서 성인은 어진사람을 보면 그를 따라 같이 되기를 생각하라 하였던 것이다.

어진 사람은 무엇을 미워할 줄은 몰라도 무엇을 사랑할 줄을 안다. 남을 사랑하는 일만큼 올바름은 없는 법. 그래서 올바름에는 이패 저패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디서나 패 가름을 해서 시비를 걸고 승패를 결어 놓고 서로 이기자고 용심(用心)을 부린다. 이러한 순간 어질지 못한 자를 만나면 자신을 돌이켜 반성해 보라는 성인의 말씀을 상기한다면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가 날아가 앉아도 그 백로는 까마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날이 밝으면 등불을 켜서 손에 들고 마을 골목을 누비면서 사람을 찾는다고 외치며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디오게네스란 철학인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를 본 마을 사람들은 무어라 했을까?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거지처럼 남루한 디오게네스는 거짓이 없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사람을 속이고 울리고 등치는 짓거리를 사람이 한다는 것은 제 살을 제가 베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을 디오게네스는 알았다.
한 처녀를 놓고 사랑한다는 사내가 둘이 있었다. 그 셋은 한 마을에서 태어나 살았다. 한 사내는 애꾸였고 다른 사내는 미남이었다. 미남이 찾아와 그 처녀에게 달콤한 말로 그녀의 귀를 솔깃하게 하면서 꺾어온 나리꽃을 건네주며 사랑의 징표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당당하게 돌아갔다.

처녀는 뒤돌아 가는 미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음날 애꾸가 처녀를 찾아왔다. 아무말없이 외눈으로 처녀를 보면서 입술에 웃음만 짓고 있었다. 입이 있지만 애꾸는 그녀를 사랑한다는 속마음을 나타낼 수가 없었다. 어렵게 말문을 열어 처녀에게 보여줄 것이 있으니 귀찮겠지만 동행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뒷동산 나리꽃 밭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나리꽃 무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보라고 처녀에게 권하면서 해마다 피는 나리꽃을 그녀를 데려와서 해마다 보여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처녀를 바라보았다. 처녀는 그 표정을 읽었다. 그리고 둘은 손을 잡았다. 처녀는 누구의 사랑을 받았을까? 물론 나리꽃 밭에서 손을 잡은 애꾸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이다.

겉모습이 잘 생긴 것만 믿고 나리꽃을 꺾어온 미남은 그렇게 처녀를 꺾으려고 했다면 애꾸는 속마음이 잘 생겨 산에 절로 피는 나리꽃을 꺾을 수 없어 산 그대로 처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사랑함이 올바른가를 처녀는 알고 배필을 정했으니 어찌 사랑을 받지 않고 어찌 행복하지 않을 것인가? 그래서 어짐과 진실은 소중한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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