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날’을 맞아 하는 기념사는 그 역사적인 날이 가지고 있는 참 의미와 서사(敍事)의 가치를 기리는 내용과 맥락이 닿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하는 기념사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런 까닭에 기념사의 내용은 역사적인 날의 서사가 어떠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서사가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인 내용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윤석열 대통령의 63주년 4·19 기념사는 매우 거친데다 4·19혁명이 갖는 본래의 뜻과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윤 대통령은 지난 19일 4·19 기념사를 통해 “거짓 선동, 날조, 이런 것들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들이 독재와 전체주의 편을 들면서도 겉으로는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행세를 하는 경우를 세계 곳곳에서 많이 봐 왔다”면서 “이러한 거짓과 위장에 절대 속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또 “우리가 피와 땀으로 지켜온 민주주의는 늘 위기와 도전을 받고 있다. 독재와 폭력과 돈에 의한 매수로 도전을 받을 수도 있다”면서 “그러나 지금 세계는 허위 선동, 가짜뉴스, 협박, 폭력 선동, 이런 것들이 진실과 자유로운 여론 형성에 기반해야 하는 민주적 의사결정 시스템을 왜곡하고 위협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4·19혁명 열사가 피로써 지켜낸 자유와 민주주의가 사기꾼에 농락당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라며 다소 거친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윤 대통령의 발언은 구체적 대상을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정국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행세’를 하는 진보진영의 정치인을 싸잡아 비난하며, ‘돈에 의한 매수’는 민주당의 ‘돈봉투 의혹’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가짜 뉴스’와 ‘민주적 의사결정 시스템의 왜곡’은 최근 20%대로 떨어져버린 대통령 지지율과 맥락이 닿아있는 것으로 읽힌다.
대통령의 기념사는 특정 진영과 정파, 정치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마련돼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날’이 가지고 있는 참뜻을 헤아려 더 나은 우리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4·19혁명 기념사의 내용은 1960년 4월 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3·15 부정 선거에 대한 반성과, 12년간 이어진 이승만 장기 독재 체제의 거듭된 실정(失政)으로 인한 민심 이반, 그리고 그에 항거한 학생과 교수,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고양하는 것이어야 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이 독재에 맞서 스스로 쟁취한 것이라는 내용이 담겼어야 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번 뿐만이 아니다.
지난 3·1절 기념사도 큰 논란을 일으켰었다.
한국과 일본의 최대 현안인 ‘강제동원 노동’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침략자’인 일본 군국주의엔 면죄부 주며 ‘파트너’로 격상시켜 여론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었다.
일국의 대통령다운 품격과 정제된 언어로 쓰인 기념사,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비전을 제시하는 지도자의 결연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기념사는 언제쯤 나오게 될까. 참으로 아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