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칼럼]  박성규 한의학 박사·예올한의원 원장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누나의 외손자로 후손이 없었던 카이사르의 양자 및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국의 혼란을 잠재우고 안토니우스 내란을 평정했다. 카이사르가 정복한 영토를 안정시키고 집정관과 원로원을 능가하는 권력을 쟁취하여 로마 제국 초대 황제에 올랐다. 아우구스투스는 존엄한 자라는 뜻으로 옥타비아누스에 주어진 칭호였으며 이후 로마 황제를 뜻하는 명칭이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였다. 군대를 진두지휘해야 했음에도 옥타비아누스는 말을 타지 못할 정도로 허약했다. 천재적 재능과 건강을 자랑하던 카이사르와 달리 옥타비아누스는 허약하고 군사적 재능은 결여되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의 수성 재능을 알아본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견실한 통치를 위해 일찍이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입적하여 후계자 수업을 시켰으며 그를 보좌하기 위해 건강한 아그리파를 친구로 붙여주었다. 카이사르 사후 옥타비아누스가 보여준 탁월한 정치적 능력은 카이사르의 지인지감이 비범했음을 알게 한다.

로마 황제의 업무는 매우 과중하였다. 로마에 앉아서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통치를 시행했는데, 초기 단계였기에 모든 기반을 마련하는데 많은 정력이 소요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문밖을 나서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는 경륜으로 로마 제국 400년 기틀을 마련했다. 오히려 안정된 제국을 계승한 후대 황제들이 과중한 업무로 단명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옥타비아누스의 업무량이 얼마나 살인적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본인의 허약 체질을 잘 알고 있어 단명할 것이라 예상하였다. 따라서 사후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위해 건강한 친구 아그리파에게 제국의 안녕을 맡기려 했다. 아그리파를 이혼시키고 자신의 딸 율리아와 결혼하게 하여 그 자손으로 하여금 제국의 통치를 이어 가도록 계획하였다. 하지만 튼튼하였던 아그리파는 50대 초반에 사망하였고 허약한 옥타비아누스는 78세까지 장수하였다. 통치 기간만 41년에 이른다.

옥타비아누스의 건강관리 비법은 소식과 규칙적인 생활이었다. 수면과 식사 그리고 업무 시간을 명확히 정하여 매일 규칙적으로 생활하였다. 이는 한의학의 건강관리에도 가장 부합하는 생활습관이다. 유사한 생활습관으로 칼날 위에 선 것과 같은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왕위를 쟁취하고 조선의 부흥을 꾀하였던 임금이 영조다. 과중한 업무로 대체로 단명하였던 여타 조선왕들과는 달리 영조는 83세로 장수하였고 재위 기간만 52년이다.

숙종의 서자로 태어난 영조는 경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보위에 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압박을 받았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험난한 정국을 헤쳐나가야 했다. 왕권이 안정되었을 때는 세자의 난동으로 또 다른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세자를 손수 죽이고 세손을 키우며 많은 회한과 근심 속에서도 격무에 전심을 다하였다. 조선 중기 막바지를 장식한 부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비상한 정치 능력으로 정국 안정을 꾀하였으며 국정 운영을 위한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다양한 방면에서 치적을 세웠다. 백성들의 삶을 위해 위정자들의 검약을 강조하였고 이를 솔선수범하였다. 일체의 낭비 요소를 없앴으며 백성의 식량 확보를 위해 금주령을 내렸고 고려 때부터 500년 가까이 시행되었던 경신수야 악습도 없앴다. 이런 검약은 조선 부흥에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인 건강에도 큰 효과가 있었다.

수명과 건강은 선천적인 요인도 중요하지만 생활습관이 보다 결정적이다. 규칙적인 생활과 소식은 옥타비아누스나 영조처럼 허약한 체질이라 하더라도 건강하게 천명을 누릴 수 있게 한다. 건강은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스스로 현명하게 관리하고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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