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눈] 김재국 문학평론가·에코 색소폰 대표

오늘 이른 아침 공원에서 보기 드문 풍경을 보았다. 필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 공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십여 명의 주민이 운동을 하고 있다. 사십대 한 명과 오십대 한 명이 앞서 걷고 있었다. 빠른 걸음의 오십대가 앞서 걷던 사십대 어깨를 툭 쳤다. 곧바로 사과를 하는 것을 보니 고의는 아닌 듯했다. 느릿느릿 걷던 사십대는 사과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십대를 따라가며 뭐라고 투덜거렸다. 이후 오십대가 또 사과를 하는 듯했으나 사십대는 쫓아가며 지속적으로 불만을 토로하였다. 충분히 사과를 했고 그 정도면 사건이 해결될 듯도 한데 급기야 사십대는 오십대의 어깨를 고의로 치면서 시비를 걸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우리 사회가 너무 각박하고 극단을 치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언론 보도에도 인면수심의 반윤리적 흉악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사회적 충격을 주고 있다. 서로 이해하고 화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는 형국이다. 흑색이 아니면 백색이고 백색이 아니면 흑색일 뿐만 아니라 너 편이 아니면 네 편이고 네 편이 아니면 너 편이다. 흑색도 백색도 아니거나 너 편, 네 편도 아닌 중간지대가 존재하지 않는 극단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문득 조선 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부사 등 이십사 년을 정승의 자리 있었던 황희 정승이 떠오른다. 그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평소 학문에도 게을리 하지 않아 높은 학덕을 쌓았으며 특히 태종의 신임이 두터워 늘 겉에서 함께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어느 날 황희 정승 집에서 일하는 두 여종이 말다툼을 벌였다. 이유인즉슨 손님이 오기로 한 날 청소부터 할 것인가, 음식부터 할 것인가라는 의견 차이 때문이었다. 둘이서 옥신각신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아 정승을 찾아 갔다. 한 여종이 먼 길을 오시는 손님이 시장 할 테니 음식준비부터 해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여종은 집안이 깨끗해야 손님 기분이 좋을 것이라 했다. 그러자 정승은 두 사람 모두에게 맞는 말이라고 전했다, 지켜보던 부인이 참다못해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혀주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말씀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정승은 부인 말도 옳다고 하자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황희 정승이 어리석고 줏대가 없어서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다. 어느 한쪽에 기울이지 않고 중간자의 입장에서 양쪽을 모두 이해해야겠다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사소한 갈등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갈등을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 편에 설 것이 아니라 중간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우기는 태도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을 성인(聖人)이라 부른다. 성인은 사람에 대한 최고의 존칭어라고 한다. 황희 정승도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살벌한 극단을 치닫고 있는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등대와 같은 많은 성인이 나타나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성인이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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