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은 태산보다 험하고 하늘보다 알기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태산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아래 뫼 일뿐이고 아무리 알기가 어렵다 해도 사랑함이란 열쇠로 풀고 올바름이란 지팡이로 버틸 줄 알고 진실이란 다리로 걸으면 험준해 보이던 태산도 오르게 되고 멀리만 보이던 하늘도 가까워진다고 확신해도 된다. 어차피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이므로 더도 덜도 아닌 중간을 잡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중용이다. 중용은 곧 덕인 것이다. 너와 나 그리고 만물을 두루 이롭게 하면 덕인 것이다. 사람이 되라 함은 인간이라면 덕을 갖추라는 것이다. 나하고 너하고 사이에 덕이란 하나의 외나무다리와 같다. 덕은 내가 너를 향해 건너가게 하고 네가 나를 향해 건너오게 하는 다리와 같다. 내가 네가 되어보고 네가 내가 되어보면 그 둘 사이는 막히는 쪽보다 뚫리는 쪽이 된다. 하늘은 구멍을 뚫는데 사람은 한사코 구멍을 막는 꼴을 하고 산다. 목숨이 살 수 있도록 구멍을 뚫는 것은 덕이요 목숨의 구멍을 막는 것은 부덕이 아닌가! 우리는 사람의 막힌 구멍을 열심히 뚫어야 한다. 사람이 되기 위하여 쉬지 말고 스스로 덕을 닦아야 한다. 이는 무엇보다 먼저 사람이 되어 사람 구실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용은 바로 덕이고 그 가치는 무한히 지극한 것이다.
왜 우리는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가? 내 욕심이 넘쳐서 그렇게 아파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혹을 떼려다 붙이는 망신을 당하는가? 내 욕심이 과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덕은 줄어들고 욕심을 나누면 나눌수록 덕은 불어난다. 덕이 줄어들면 인간이 사는 세상은 얼어붙고 덕이 불어나면 인간이 사는 세상은 풀려 훈훈해진다. 꽉 조이고 막힌 세상을 원하는가 아니면 훤하게 트여 시원한 세상을 원하는가? 누구나 시원하게 열린 세상을 원한다. 그러한 세상을 원한다면 우리는 저마다 덕을 넓혀야 한다. 세상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그 점 속에서 인간들은 서로 아옹다옹하면서 하루도 전쟁 없이 보낸 날이 없다. 우리가 중용이란 덕을 잊은 탓이다. 이 얼마나 막막하고 답답한 인간들인가!
나라는 나라끼리 싸우고 집단은 집단끼리 싸우고 가정마저 권속끼리 싸운다. 서로 믿고 사랑하고 용서하는 덕은 이제 마를 대로 말라 버렸다. 그래서 세상은 잔인하고 살벌하다. 이 지경이 되어버린 세상을 첨단과학이 고쳐 주리라고 믿지 마라. 세상이 앓고 있는 아픔을 더하는 것도 사람이고 줄이는 것도 사람이며 없애는 것도 사람이다. 그러니 덕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면 덕은 스스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