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종합제철 준공
一貫工程(일관공정) 종합 工場(공장)으로서는 國內(국내) 最大(최대)이며 重化學工業(중화학공업) 건설에 획기적인 先導(선도) 역할을 담당하게 될 浦項(포항)종합제철공장 종합 竣工式(준공식)이 3일 하오 2시 三府(삼부) 요인과 주한 외교 사절 및 많은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浦項工場 現場(현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종합제철은 70년 4월 1일 공장건설에 着工(착공)한 지 3년 3개월 동안 外資(외자) 1억6천8백만弗(불)(日本(일본)과 오스트리아 借款(차관) 및 청구권자금)과 內資(내자) 1억1천6백만弗 등 도합 2억8천4백만弗(1천2백15억원)을 投入(투입), 製鐵(제철)·製鋼(제강)·熱延(제련)·厚板(후판)등 10개 單位(단위) 공장과 原料(원료)처리 등 12個(개) 附帶施設(부대시설)의 건설을 단계적으로 끝마쳐 이날 종합 竣工式을 갖게 된 것이며 粗鋼(조강) 생산 年(연) 1백3만톤의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東南亞(동남아)에서는 日本 다음으로 製鐵·製鋼·壓延(압연) 등 一貫생산체제를 갖춘 종합제철은 日本의 新日本(신일본)제철 및 日本鋼管(일본강관)과 기술 제휴, 현대식 최신 시설과 자동운전방식의 操業(조업)체제를 구비했으며 각 工場의 施工(시공)은 現代(현대)·大林(대림)·東亞(동아)·高麗(고려)·平和(평화)·極東(극동)·三扶(삼부) 및 三煥(삼환) 등 국내건설업자들이 맡았다.
정부는 粗鋼기준 年産(연산) 1백3만톤의 이번 준공식에 이어 오는 12월 2백60만톤 규모의 2次(차) 擴張(확장)공사에 착공, 76년에 준공시키고 이어 79년까지는 7백만톤 규모로 확장할 계획이다. <8727호·1973년 7월 4일자 1면>
포항제철이 설립된 건 1968년이었다. 1970년대 영일만에 포항제철소를 착공하고, 3년만인 1973년 7월 4일 준공했다. 이후 1980~90년대에 광양제철소를 준공했으며, 1998년 조강생산 기준 전 세계 1위의 철강회사로 성장했다.
포항제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초대 사장을 역임했던 박태준(朴泰俊·1927~2011년)이다.
그는 포항제철의 창업과 건설, 경영에 평생을 바쳤다.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철강사 ‘8년 연속 1위’로 올려놓은 그는 ‘한국의 철강왕’으로 불렸다.
1965년 6월 어느 날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러서 조국 근대화를 위한 두 가지 계획을 털어놓는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종합제철소 건립이 그것이었다. 그러면서 박태준에게 말했다.
“고속도로는 내가 직접 감독할 테니, 종합제철은 임자가 맡아.”
포항제철은 일본 자금을 끌어다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늘 말하곤 했다.
“목숨을 걸자. 조상의 핏값으로 짓는 것이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사무실에서 똑바로 걸어 나와 우향우 한 다음 영일만 앞바다에 몸을 던져야 한다.”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그의 ‘우향우 정신’이다. 그만큼 절박했고 그만큼 비장했었다.
생전에 박태준은 평생 가장 값진 보람으로 꼽은 것이 1987년 5월 ‘베세머 금상’ 수상이라 했다고 한다.
그는 포스코를 국가산업의 동력으로 삼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금탑산업훈장·국민훈장무궁화장·오스트리아 금성공로대훈장·서독공로십자훈장 등을 받았으며, 사후에는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됐다.
/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