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칼럼] 박성규 한의학 박사· 예올한의원 원장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한상질은 청주 사람인데,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중외의 벼슬을 두루 지냈으며 모두 성적이 좋았다. 국초에 어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가 ’조선‘이란 국호를 받았다. 동생 한상경은 조선 개국 공신으로 후에 영의정에 오른다. 한상질의 손자 한명회는 개국 공신 후손이었지만 마흔이 되도록 과거 시험에 계속 낙방하여 결국 음서로 말단 한직을 얻는다. 음서로 얻은 자리이기에 묘지기, 궁궐 문지기 등을 전전하며 동료들의 따돌림까지 받았다.
조선의 음서제도는 공신의 후손에게 관직을 주었으나 말단 한직에 국한하였으며 능력에 상관없이 승전이나 승진이 어려웠다. 더구나 동료의 멸시를 받아 정상적인 관직 생활이 어려웠다. 서른세 명을 뽑는 과거 시험을 통과해야만 출세의 길이 조금이나마 열렸다. 한명회가 마흔까지 과거 시험에 도전한 이유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세습 구조를 굳히고 있다. 사법 시험의 폐지와 법전원 설치로 법조계에 세습의 길이 열렸다. 변호사가 대량 배출됨에 따라 능력있고 소명감이 있는 이라도 연줄이 없으면 판검사의 길은 요원하고, 능력이 없더라도 부모의 후광을 갖은 이는 대형 로펌과 판검사의 길이 쉽게 열린다. 사법 시험이 엄정하게 진행되던 때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의료계 세습도 획책되어 의전원을 설치하였지만 의료인 자질 문제로 대부분 폐지되어 일부만 남아있다. 도마에 오른 부산대 의전원 사태는 기득권층의 비리를 일부 드러냈을 뿐이다.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외무 시험은 외교관 세습을 가능케 한다. 오랜 기간 엄정하게 진행되었던 대학 입시도 수시 도입으로 기득권 자녀의 명문대학 입학이 쉬워졌고, 대학에 많은 권한을 부여하면서 대학 입시 비리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선관위 사태에서 보듯이 공직 세습도 곳곳에서 자행되고, 어설픈 지방 자치제도는 공직 세습을 전국화하고 있다. 심지어 좋은 직장의 경우 노동자의 세습 고용도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세습은 조선과 달리 부정 고용된 자가 오히려 승승장구한다. 부모나 친척의 후광으로 단번에 높은 직급을 받는 것은 물론 승진 기회도 잦다. 조선에서는 외척의 발호로 국정이 문란했을 때만 나타났으며, 외척의 세도 정치가 횡행하여 정치가 실종되자 결국 무기력하게 망국에 이르렀다. 우리는 지금 조선 말기를 총체적으로 답습하고 있다. 임금이 주권자였던 조선에서는 호가호위하던 무리가 혼군 주위에 포진했던 반면, 국민이 주권자인 대한민국에서는 모리배들이 전국적으로 포진하여 국가를 좀먹고 있다.
내신 비리를 공모한 여고생은 바로 기소되었지만, 대학 대학원 입시 비리를 공모한 장관의 딸은 수년이 지난 지금에야 여론의 압박으로 겨우 기소되었다. 주권자를 대리하는 정치인의 부정부패는 몇 년째 재판이 지연되고 있으나 주권자는 기소 전부터 구속된다. 주권자의 성범죄는 사회생활을 이어가지 못할 정도의 처벌을 받는 반면 판사의 성범죄는 처벌도 경미할 뿐만 아니라 법조계에서 승승장구한다.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한시적으로 운영한다던 비정규직 제도는 오히려 더 공고해졌다.
수많은 불공정 사태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고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공정 시스템 붕괴는 민주화 이후 시작되고 가속화되어 누구를 위한 민주화였는지 개탄하게 된다. 사회 불공정은 국가경쟁력을 저하하고 계층 간 이동을 억제하여 갈등을 심화하고 지속적인 사회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때아닌 독재 정권 향수가 싹트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주권자의 주권의식 부족과 무능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모든 사태의 원인은 주권자인 우리가 현명하지 못해 생긴 일이다. 광해 고종 등 조선의 혼군만도 못하면서 주권자 행세를 하고 있기에 쉽게 선동되어 전국적 모리배를 양산하고 있다. 주인이 우매하면 집안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