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론] 김복회 전 오근장 동장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농사일로 바쁜 엄마에게 전화를 하니 들깨를 털어야 한다며 걱정하신다. 생전 바쁘니 와서 일하라는 말씀을 안 하시던 엄마가 들깨 터는 것을 걱정하신다. 이젠 힘에 부치시나보다. 급한 마음에 바로 달려갔다. 막내 여동생과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어릴 적 마당에서 방망이로 두드리며 들깨를 털었던 기억이 났다.

오랜만에 도리깨질을 하니 어색했지만, 자꾸 하다 보니 옛날 실력이 나오는 것 같다. 농촌 일이 많이 기계화 되었다지만 수작업을 해야 하는 것도 많다. 도리깨질을 하며 저 너머 기억의 조각들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어릴 적 농촌은 모두가 어려웠다. 어려운 살림에 우리 집은 딸이 여섯에 막내가 아들이다. 아들을 낳기 위해 딸을 그렇게 많이 낳은 것이다.

동생이 많다보니 중학교도 갈 수 없었다. 부모님 농사를 도우며 일하다가 중학교 보내달라고 아버지께 떼를 써 뒤늦게 간신히 갈 수 있었다.

동생들이 많다보니 항상 맏이인 큰언니가 잘 해야, 동생들에게 본보기가 될 것 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며 살아왔다. 부모님께도 맏이로서 역할을 잘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동생들의 대학등록금을 한 번씩 내주기도 했다. 막내여동생에게는 대학 4년 동안 매달 용돈을 주기도 했다.

오늘 막내와 일을 하면서 용돈 준거 생각나냐고 물으니 그 용돈으로 한 달 동안 구내식당에서 밥 사먹고도 조금 남았었다고 한다. 우리 막내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고향에 내려와 농촌을 살려보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막내가 엄마랑 같이 있어 언니들은 항상 맘이 놓인다.

그런 동생이 며칠 전에 여행을 갔다. 셋째 여동생이 가족과 함께 가는데 동생 둘을 데리고 갔다. 여동생들이 모처럼 여행을 간다고 하는데 그냥 있을 수 가 없어, 잘 갔다 오라는 편지와 함께 용돈을 주었다.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동생들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막내 동생 덕분에 엄마에 대한 걱정이 없었는데 빈자리가 너무 컸다. 불안한 마음에 매일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걱정 말라며 전화 안 해도 된다고 하시지만 걱정이 앞선다.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막내가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왔다. 엄마가 막내딸을 낳았을 때 큰 엄마가 산관을 해 주셨는데 그때 엄마가 “저 애 내다 버리라”고 하셨다. 아들을 기대했는데 여섯 째 딸을 낳으시고 얼마나 속상하셨으면 그러셨을까 하는 마음에 가슴 아팠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그렇게 내다버리라고 한 딸이 지금 엄마와 함께 살고 있으니 세상일이란 참알 수 없는 것 같다.

우리 엄마는 딸을 많이 낳아 울기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딸이 많아 동네에서 당신이 제일 행복하다고 종종 말씀 하신다. 가족 구성원 중에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맏이의 역할이 참 지혜로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살아오면서 힘들 때 마다 내게도 언니나 오빠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하며 살아왔었다.

그러나 지금이 좋다. 우리 형제들은 모이면 애들 다 키워놓고 고향에 집을 지어 모두 함께 모여살고 싶다고 종종 말한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맏이의 역할은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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