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입학선물을 해준 건 큰매형이었다.
큰매형은 맞춤교복에 에센스 영한사전을 큰돈을 들여 장만해 줬다. 그리고 무심한 듯 툭, 한 마디 던졌다.
“공부 열심히 하고, 또 어디 가서 빠져보이지 말고.”
촌동네에선 입학이니 졸업이니 하는 ‘의례적인 행사’에 뒤따라야 할 ‘의례적인 선물’이 매우 드물었다. 서로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으니, 제 앞가림하기도 바쁜 시절이었으니. 그래서 큰매형이 건넨 ‘뜻밖의 선물’은 ‘기쁨 두배’였다.
에센스 영한사전은 앞 몇 장만 까맣게 때를 탓을 뿐, 뒷장은 깨끗했다. 큰매형의 바람과 달리, 별로 공부를 안했다는 뜻이다. 큰매형이 선물한 교복은 ‘맞춤복’이었다. 대부분 기성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몸의 라인을 타고 매끄러운 곡선을 세련되게 그려내는 맞춤교복은, 단 한 번도 내색은 안 했지만 내겐 긍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큰매형은 15살 아래인 나를 유독 귀여워했고 챙겨줬다. 큰형 같고 아버지 같은 큰매형을 나는 참 좋아했다.
한 번은 큰매형과 더덕 채취에 나섰다. 전방에서 군복무했을 때 아기 팔뚝만한 더덕을 캐서 고추장에 찍어 먹곤했다는 다소 과장된 내 말에, ‘그럼 지금 한 번 가볼까’하면서 그길로 너댓 시간은 족히 걸릴 화천으로 1t트럭을 몰고 갔던 기억이 선하다. 이 산 저 산 훑었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수백리 걸음을 하고 허탕을 쳤는데, 큰매형은 “이게 다 추억이지” 하지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막내 처남이 구라(거짓말)도 칠 줄 아네, 껄껄껄.”
큰누나와 큰매형이 이혼했다.
딸 둘 아들 하나, 슬하의 삼남매가 모두 스물을 넘겨 장성한 뒤였다. 사유는 모른다. 큰매형과 큰누나는 왜 헤어지게 됐는지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온갖 것들에 붙여야 할 이유는 수만 가지는 될 터이니, 그 중 무엇이 그 하나의 이유라 해도 그 사정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라 할 수는 없을 터였으니. 그럼에도 큰매형과 나는 사이가 좋았다. 난 여전히 큰매형을 좋아했고, 큰매형은 ‘우리 막내처남, 막내처남’ 하며 아껴줬고 존중해줬다.
큰매형이 재혼을 한 뒤부터 관계가 소원해졌다. 서로 불편할 것 같았고, 새로 들인 여자에 대한 예의도 아닌 듯했기 때문이었다. 후처로 들인 이는 큰매형과 나이 차가 20년인가 나는 필리핀 여자로 전해 들었다.
몇 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큰매형이 유명을 달리했다.
큰매형의 새여자는 ‘끈 떨어진 연’과 같은 신세가 됐다. 의지할 데가 없는 그녀였다. 고국으로 돌아가 봐야 낙이 없다며 한국에 그냥 남겠다고 했다고 한다.
큰매형 장례를 치르면서 큰매형의 새여자에게 큰누나가 말했다.
“자네 처지도 참 딱하네. 내 힘은 없지만, 날 형님처럼 생각하고 의지하게.”
물심양면 도와줄 만큼 큰누나의 형편이 좋은 건 아니지만, 큰누나가 그녀를 생각하는 것은 딸을 대하는 엄마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시앗을 보면 길가의 돌부처도 돌아 앉는다’고들 말하는데, 참 혜량하기 힘든 마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큰누나가 며칠 전 칠순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