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학교가 긴 방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방학은 다음을 위한 재충전의 시기이다. 리크리에이션은 여러 가지 방안이 있겠지만 여행은 필수다. 일상의 반복되는 시간과 장소를 벗어나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자신을 조용히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방학을 맞으며 나의 첫 여행은 서울 한강변에 위치한 양화진이라는 곳이다. 조선왕조의 인후역할로서 교통, 국방, 문화의 중심지 버들꽃나루, 그곳에 외국인선교사묘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헐버트 박사가 영면하고 있음이다. 중고교시절 수업시간에 몇 번 스쳐 들었던 헐버트에 대하여 모 방송 역사스페셜에서 그 사람을 다시 깊게 만나게 된 것은 퍽 소중한 축복이랄까?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 나는 입때껏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서 한국인을 가르쳤고 선교사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헐버트야말로 참 교육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일본의 무자비한 침탈로 국권이 흔들리자 백성들이 우선 배워서 힘을 길러야 한다고 판단하고 먼저 자신이 한글을 배우는데 몰두하였다. 자비로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한글을 샅샅이 익혀 불과 3년 만에 최초의 순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저술해 교재로 사용했으니 참 교사로서의 모범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한 그는 독립신문 발행에도 참여하여 띄어쓰기를 도입했으며,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최초로 채보한 사람이라니 더욱 놀랍다.

구한말 우리나라는 일본제국으로부터 풍전등화의 위협을 겪게 되는데 헐버트는 교육 울타리에 머물지 않고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 외교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조선의 자주권 회복에까지 헌신하기 시작한다. 을미사변이후 헐버트는 고종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및 자문 역할을 하며 미국 등 서방에 일본의 부당성을 알리려 애를 태우며 백방으로 뛰어다니게 된다. 어떻게든 나라를 지켜내려 했던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특사 3명을 파견하는데, 헐버트를 사전작업 공헌자로서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했으니 그 사람의 역할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왠지 동방의 나라 코리아에 가고 싶어 교사로 지원했다가 온몸으로 한국을 사랑하게 된그 사람!

내가 양화진 묘소를 찾아간들 그 분과 말 한마디 나눌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가서 고개숙여 참배라도 드리는 것이 도리다 싶어 방학에 드는 첫토요일 서울행을 감행한 것이다.

공원으로 단장된 양화진 묘원 앞쪽에 정말로 그 분이 잠들어 있었다. 내 가슴은 그간의 기다림에 쿵쿵 뛰고, 초록 이불을 덮고 낮게 누워있는 그 분은 말이 없다.'헐버트 박사의 묘'라고 쓰인 회색의 굳건한 묘비가 의연히 맞아준다. 이 묘비명은 양화진에 안장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쓰기로 했는데 다음해 6.25가 발발하여 미루어오다가 서거 50주기에 김대중 대통령이 휘호를 내렸다 한다.

혈연 지연 아무것도 아쉬울 것 없는 한 이방인이우리나라에 와 젊음을 바치고 마지막 몸까지 내 나라 내 땅에 바친 사람.

2차대전 패배로 일본은 물러가고 1949년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추어 헐버트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초청을 받아들인다. 86세의 노령에 배를 타고 한국으로 떠나며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유언에 따라 오늘이 있게 된 것이리라.

한 파란 눈의 선구자가 온 마음과 몸으로 사랑한 대한민국! 내 나라는 영구히 위대해야 한다. 지구촌에 우뚝 살아 숨쉬는 대한민국을 이루어가는 일 예나지금이나 교육의 몫이다. 국사는 바르게 알고 숨김없이 가르쳐야 한다. 역사에서 배움으로써 더 강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 국민들도 나라를 위한 진정한 발전에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헐버트, 그 사람이 다트머스대학 졸업 후 신상기록부에 남긴 이 말은 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진정한 교육과 사랑이 무엇인지 한국인 모두에게 묻고 있다.




/박종순 회남초 교감·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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