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평범하다. 물론 기이한 짓을 하는 사람도 있고 미친 사람도 있으며 지능이 낮아 바보천치가 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하게 태어난다. 다만 사람이 바라는 바를 찾아 깨우쳐가고 닦아서 사람은 왜 사람이며 어째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면 그가 곧 현자의 길을 걷는 셈이다.
현자는 한 순간에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의 일은 대개 이해상관으로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일에 부딪치면 사람은 저마다 제 실속을 차지하려고 한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고 남이 덜 차지하기를 바라면 그것이 바로 욕심이다. 욕심만 부리면 다 되는 것으로 고집하는 사람은 현자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이란 저 나름의 욕심을 간직하게 마련이므로 더도 덜도 할 것 없이 공평무사하게 욕심을 나누어 갖도록 이해(利害)를 처리하면 그런 사람이 바로 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셈이다.
오늘날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일생을 현자(賢者)로 일관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항상 무엇이 현자다운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하여 마음이 넓고 깊어 너그럽고 관대할 수가 있다.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은 나보다 남의 형편을 더 생각하려고 한다. 내가 그 사람의 처지가 된다면 어떨까를 따져보고 그 남의 처지에서 나를 다루어 단련시키고 자신의 내면에 용솟음치는 욕심을 절제하고 억제하여 일들을 풀어간다. 이것이 바로 현자의 행위이며 사고인 셈이다. 그래서 현자는 한 가지 것만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간장 종지만한 사람은 그 종지에 알맞은 인의(仁義)가 담기고 물동이만한 사람은 그 동이에 담을 만한 인의(仁義)가 있다. 그래서 인의(仁義)에는 크고 작음이 있다.
현자는 자신의 생각을 살피고 자신의 행동을 살핀다. 자신의 생각이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면 그것은 바로 현자의 생각이며 자신의 행동에 뉘우칠 것이 없다면 그 행동이 곧 현자의 것이다. 뉘우치는 지이나 부끄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의심할 줄을 모른다. 남을 믿어주고 남이 자신을 믿게 하면 그 사람이 바로 현자다운 것이다. 그래서 남의 말을 들을 때 의심이 가는 것은 한 귀로 흘려버리고 확실한 것만을 귀담아 들을 것이고 많은 것을 보되 위태로운 것을 제하고 바람직한 것만을 행하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두루 통할 수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임을 깨우치고 실천하면 그러한 경우가 바로 현자의 길을 걷는 셈이다. 못된 짓을 말리고 좋은 짓을 넓히는 마음에는 파당이란 없다. 그래서 현자는 두루 통할 뿐 한편에 기울어지지 않는 것이다. 현자는 대인이다. 그러면 소인은 누구인가? 항상 편을 지어 싸움을 벌이는 자이다.
현자는 사라지거나 죽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여서 삶을 누리는 한 현자는 항상 살아서 빛을 발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현자다운 생각과 행위를 할 수도 있고 소인다운 생각과 짓거리를 할 수 있는 심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을 편하게 해주고 아끼고 돕는 일을 많이 한 날은 현자답게 삶을 보냈고 남을 속이고 불편하게 하면서 제 욕심을 못 이겨 화풀이를 한 날은 소인답게 하루를 보낸 셈으로 스스로 따져 본다면 그것이 바로 현자의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수기(修己)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누구는 현자이고 누구는 소인배라고 결단할 것은 없다. 현자가 될 욕심이 있는가? 그러면 현자가 된다. 왜냐하면 현자는 어머니 자궁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